바뀐 것은 없었다.
농장에서의 즐거웠던 날들은 끝이 났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 나와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쓸모 없어진 사냥개처럼 버려졌다. 이게 현실이었고 예상했던 결과였다.
나는 최대한 빨리 다른 일을 찾아봐야 했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되었고 일자리가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인지 세계 각국의 워홀러들이 시티의 백팩커스로 몰려들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한산했던 백팩커스는 도미토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붐볐다.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에서 일자리가 많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일을 구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스티브 형님과 소피 누나는 떠났고, 나는 마크 형 그리고 기욱과 함께 일을 구하러 다니게 되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내가 중심이 되어 함께 움직이게 된 것이다. 3명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구해야 한다는 것. 힘든 게임이 시작되었다.
일을 구하기 가장 쉬운 사람은 혼자이면서 차를 가진 사람이고, 그 다음이 차를 가진 두 명이었다. 세 번째는 차가 없지만 혼자인 사람이었고, 네 번째가 차 없는 2명이었다. 현실은 냉혹했다. 자동차가 있었지만 세 명은 아무도, 어디에서도 반겨주지 않았다. 공장에서 대규모 직원 채용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세 명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 어디에도 3명을 동시에 고용하는 곳은 없었고 세 명이서 일을 구하다 보니 조건을 맞추기가 까다로워졌다. 일을 두고 세 명의 의견도 분분했다. 두 명을 모집하는 농장 일들이 드문드문 에이전시에 등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내가 그리로 훌쩍 떠나버릴 수도, 마크 형과 기욱에게 그리로 가 보라고 할 수 없었다. 마크 형은 '우리'가 함께 해야한다는 말을 자주 했고, 나는 최대한 '함께'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호주에 처음 도착해서 일자리를 구할 때처럼 아침을 먹고 나면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잡 에이전시를 방문했고 인터넷으로 구직 자리를 찾아보기도 했으며 차를 타고 공장을 돌아다녔다. 퍼스 주변의 공장 지대, 프리맨틀(Fremantle)의 공장들은 10월부터 크리스마스까지가 최고 성수기였고, 사람들을 많이 뽑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공장 지대를 돌면서 지원서(애플리케이션/Applicatnion)를 쓸 수 있는 모든 공장을 방문했다. 공장 사무실 한켠에는 항상 지원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수 많은 사람들. 그 지원서들을 볼 때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 더미에 한 장의 지원서를 더 얹어 놓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면서 지원서에는 포스트잇을 붙여 좀 더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두 달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없었다. 누구나 공장에 들어가길 원했고, 많이 뽑았지만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퍼스로 다시 돌아온 뒤에 맞이한 첫 주말. 아무런 소식도 없이 한 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주에도 일을 구하지 못하면 혼자라도 북쪽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북쪽 지방은 퍼스보다 기온이 높았기 때문에 농장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퍼스와 남쪽 지방은 10월 중순이나 11월이나 되어야 농장이 열릴 것이었기에 농장에서라도 일을 하려면 북쪽으로 가야 했다. 일을 할 수 있다면 기온이 높은 북쪽으로 1000km, 2000km라도 갈 생각이었다.
형, 다음 주에도 일 못 구하면 북쪽으로 가려고요.
가려면 같이 가야지, 혼자 갈 거야? 같이 가 인마. 그렇지 않냐, 기욱아?
나는 시간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와인 농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지만 여행을 이어가기에는 부족한 돈이었다. 호주에 오래 머물수록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줄어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최대한 빨리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북쪽의 농장. 최후의 보루였다. 북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카날본(Carnarvon)에는 대규모 농장 지대(plant)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 있는 농장 어디든 가면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안 된다면 더 북쪽으로 가면 될 터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순 없었다.
앞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