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돈이고 여행은 여행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 순간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택하지 않았고, 이는 내가 감수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호주를 떠나기 직전, 그것 때문에 또 한 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3일 뒤면 퍼스를 떠난다.
퍼스는 나에게 절망과 환희,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기회를 준 곳이다. 나는 모든 일을 정리했고, 그동안의 임금 지급 내역(Pay slip)을 챙겨 들고 회계사 사무실을 찾았다. 조기 텍스 리턴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호주 정부에 얼마나 많은 세금을 냈던가. 조금이라도 이 돈을 돌려받기 위함이었다.
7월 22일 호주에 도착했고, 일을 구하러 다니기 시작한 지 2주 만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농장에서 6주 하고도 3일을 일했고, 그 기간동안 총 5144달러를 벌었고 세금(Tax)으로 670달러를 냈다. 중간에 캐시 잡(Cash job, 현금을 받고 일하는 것)을 한 적도 있지만, 그것과 세금은 무관한 것이었다.
공장에서는 10월 6일부터 약 9주간 일을 했다. 당초 7-8주를 생각했지만 어찌하다 보니 9주 정도 일을 하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공장에서 14,626달러를 벌었고, 세금으로 3,513달러를 냈다. 두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무려 350만 원 정도의 돈을 세금으로 낸 것이다. 매 주, 약 400달러에 달하는 돈을 세금으로 내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텍스 리턴(Tax return)을 통해 환급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크게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의 일부를 호주 정부에 주었지만 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과 세금 외에도 '연금'이라는 것이 있었다.
연금은 고용주가 (합법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해 의무적으로 가입하여 납입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연금 회사는 가입자에게 연금 번호를 알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급 번호'를 알고 있으면, 호주를 떠날 때 내 앞으로 납입된 연급을 수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소지를 여러 번 옮기는 바람에 '연금 번호'가 적힌 우편물을 받지 못했다. 두 군데의 연금 회사(와인 농장에서 일할 때, 나는 농장 소속이 아니라 '농장일을 대행해 주는 회사'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 회사에서 내 연금을 납입하고 있었다)로부터 '나의 연금'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한 것이다.
나는 실체가 불명확한 '연금'을 확인하기 위해 페이 슬립(Pay slip, 임금 명세서)을 찾아보았지만 농장에서 일할 때 받은 페이 슬립에는 연금을 어느 회사에 넣었는지 나와있지 않았고, 황급히 '고용 계약서'를 찾아보았지만 그마저도 버려버린 뒤였다. 농장에서 일할 때, 내 이름으로 들어간 연금 '470달러'를 찾아먹을 방법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장'에서 일할 때 받은 페이 슬립에는 '연금 회사'가 명시되어 있었고, 내 앞으로 들어간 연금 약 700달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텍스 리턴(세금 환급)'을 받기 위해 들른 회계사 사무실. 상황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회계사는 내게 세금으로 낸 4000달러는 돌려받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연금 회사를 알지 못하면 연금도 돌려받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470달러는 포기해야 했고, 공장에서 내 앞으로 납입한 700달러의 연금도 '연금 번호를 몰랐기 때문에'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연급 회사 콜센터로 수 차례 전화를 했으나, 그들은 연금 번호를 알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고, 결국 연금 번호를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텍스 리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부터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호주의 한 지역에 6개월 이상 머물렀거나, 머물 예정인 자."
회계사의 말로는 한 지역이 아니더라도, 6개월 이상 머물러야지만 텍스 리턴 대상의 기본적인 요건이 갖추어진다고 이야기했고, 체류 기간이 그 이하가 될 경우 오히려 가산세 징수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내가 농장에서 일하며 수입의 13% 정도를 세금으로 냈었고, 공장에서 일할 때는 수입의 24% 정도를 세금으로 냈지만(전체 소득의 약 21%를 세금으로 납부), 환급 신청 후 단기 노동자(가산세 징수 대상자. 29%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로 판명이 된다면 환급을 커녕 세금 미납분(차액. 전체 소득의 약 8%) 약 1500달러 정도를 더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회계사는 세금 낸 것이 아깝지만 '오히려 더 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텍스 리턴을 신청을 하지 말 것을 권했다.
이게 웬 말인가.
농장에서, 공장에서 일하며 그 많은 돈을 세금으로 내면서도 '나중에 환급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환급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 호주 정부에 대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복지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실컷 하다가 떠나는구나!
아, 텍스 리턴에 이런 조건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여행 일정을 좀 늦추고, 6개월을 채우고 나서 텍스 리턴을 신청할 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호주 정부에 세금으로 낸 돈 4183달러. 연금은 차치하고서라도, 세금으로 낸 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텍스 리턴과 연금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정보는 알면 돈이 되는 것이고, 모르면 돈을 잃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나는 공장을 그만두었고, 3일 뒤에는 시드니로 떠나야 했으며, 남미행 비행기 표도 끊어 놓은 상태였다.
여행자(Traveler). 일이 어찌 됐든 나는 떠나야 했다. 돈 욕심을 가져서 별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그 돈은 어차피 없는 돈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돈이 아니더라도 호주에서 즐겁게 생활하면서 즐길 만큼 즐겼고, 다시 여행할 만큼의 돈도 모았으니 마음 상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앞으로의 여행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었다.
돈은 돈이고, 여행은 여행이었다. 괜한 욕심으로 여행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었다.
앞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