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연수가 있던 날. 회사 앞에 삼삼 오오 모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봄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출발시간 보다 일찍 도착한 미소는 회사에서 나눠준 자료를 보고 있었다.
"이제 곧 4월인데 왜 이렇게 추워."
미소 옆으로 하이톤의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휴대폰을 들고 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늘하늘 거리는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 그리고 얇게 걸친 트렌치코트는 봄바람을 막긴 역부족이어 보였다.
"그럼 이거라도."
서울에 올라오기 전 엄마가 하신 말씀이 있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싸우지 말고."
"알았다. 내가 왜 싸우는데."
"니는 그게 문제다. 상냥하게 알아제?"
미소는 어딜 가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은 있었지만. 리더십도 있어서 늘 친구들이 따랐다. 하지만 또 사회는 다른 곳이니. 최대한 밝고 상냥하게 배려하면서 미소는 그렇게 미소를 장착했다. 그리고 그걸 보여줄 기회가 왔다. 상. 냥. 하. 게.
엄마가 합격 기념으로 사주신 캐시미어가 78% 들어간 울 목도리를 옆에 있는 하이톤 여자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저. 혹시 어느 부서 합격하셨어요?"
"마케팅전략본부요."
"저도. 그런데."
"잘됐다!"
감사하다는 말 대신 잘됐다는 인사를 받았지만 처음 내민 배려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미소는 신입사원 연수 내내 하이톤의 여자와 붙어 다녔다. 그 하이톤의 여자가 바로 수민이었다.
미소와 수민의 사이가 처음부터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얽히는 시점부터였다.
"미소씨. 잠깐 이리 와볼래요?"
"네. 대리님."
사수인 박대리는 그야말로 완벽남이었다. 잘생긴 외모야 당연지사. 자상한 말투와 매너. 그리고 저음인 목소리까지. 미소는 그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대리님. 이 프로젝트 업체와 조율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 이 업체가 원래 좀 조율이 힘들어요. 내가 전화해 볼게요."
언제나 상. 냥. 하. 게. 미소의 일에 조언을 주며 도와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미소는 점점 더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남자도 내 마음과 같다고. 가끔씩 들어다 나르는 간식에. 커피가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대리님. 이 마카롱 어디 거예요? 진짜 맛있다."
"숨겨둔 맛집이죠. 많이 먹어요. 매일 사줄 테니까."
'역시 스윗해. 이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오해를 안 해?'
점점 더 마음이 커진 미소는 그에게 고백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날한 야근 탓에 피곤했던지 커피라도 마시자 탕비실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춘 건 박대리와 함께 서 있는 수민 때문이었다.
"자기야. 요즘 진짜 피곤해 보인다."
'자기야?'
수민이 입에 달고 사는 단어 중 하나였다. 그래, 뭐 편하게 자기야 라고 할 수 있지. 마음을 다잡고 탕비실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박대리가 고개를 숙이더니 수민에게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눈이 크게 떠진 미소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막으며 돌아섰다. 자리로 뛰어가다 갑자기 큰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아팠다.
"과장님 죄송합니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준혁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닙니다."
"못 볼 거라도 본 얼굴인데. 어디 봐요."
"아니에요. 들어가지 마세요."
준혁은 멀찍이 떨어져 미소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다가가보려 하는 순간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그녀가 보였다. 박대리랑 부쩍 자주 어울리더니. 둘이 사귀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럼 자리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온 미소는 그날 오후 내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도저히 박대리를 쳐다볼 수가 었었다.
'박대리와 수민이 언제부터 가까워진 걸까?'
미소는 수민이게 박대리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언제 고백할까? 나 안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등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들이었다.
'오수민은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박대리와 저렇게 사귀고 있었으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한 마디를 안 할 수가 있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입사 때부터 친했고 나름 속을 터놓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아보니 얼얼했다.
'참 세게도 쳤네.'
미소는 홀로 수민과 자주 가던 냉삼집에 앉아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인 준혁은 그녀가 퇴근하자마자 따라나섰다. 허름한 냉삼집에 자리를 잡더니 맥주 한 병을 시켜 따라 마시고 있었다. 그게 성에 안 찼는지 소주도 한 병 더 시켰다.
'술꾼이네 공미소.'
멀찌감치 떨어진 차 안에서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모질게 굴었던 행동 때문에 선뜻 그 옆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빈 속에 술을 잔뜩 부은 미소가 비틀 거리며 냉삼집을 나왔다. 가방이며 옷이며 헝클어져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 차 문을 열고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공미소씨. 정신 차려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누구세요? 어머 한 과장님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알아보니 다행이네요. 집이 어디예요? 바래다 줄게요."
"과장님이 왜요? 저 혼자 갈 거예요."
준혁의 손을 뿌리친 채 뚜벅뚜벅 걷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감정이 앞선 상태여서 나쁜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차분하게 진정하고 수민과는 내일 이야기를 해야겠지?
'후~ 내 인생은 대체 왜 이러냐.'
한숨을 쉬느라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의 클랙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공미소!"
달려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준혁의 품에 안긴 미소에게선 달콤한 향수 냄새와 술냄새가 났다.
"정신 차려. 공미소."
그대로 준혁의 어깨에 쓰러진 미소가 정신을 못 차리고 슈트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