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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Apr 10. 2021

다이어리

나만의 주얼리

연말이 되면 다음 해의 새 다이어리를 고르는 일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설레는 일이다. 사실 어른이 되고서는 연말이라고 해도 심적으로만 분주할 뿐, 단순히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평이한 시간의 흐름에 지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한해의 끄트머리인 12월이 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야심 차게 방학 숙제도 계획하고 꼬박꼬박 일기도 썼다. 특별히 방학 때만은 그림일기를 쓰기도 했으니, 겨울방학과 함께 맞이하는 연말연시가 꽤나 의욕적이면서 설레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직접 카드도 만들어 색칠도 하면서 뭔가 아주 바쁘고 설렌 며칠을 보냈다고 기억된다. 유난히 눈도 많이 고, 겨울답게 추운 날들이 이어졌고, 학교에 가지 않으니 따뜻한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은둔의 겨울을 보냈다고 기억된다. 물론 그러한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눈 내리는 흐린 하늘처럼 회색빛이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아주 포근하고 행복한 기억들이다. 한껏 열려있는 개방감으로 점철된 유년시절, 특히 연말을 보내는 그 마음은 자못 숭고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그때는 사실 매일 꼬박꼬박 일기를 쓰는 것이 시간에 대한 기록의 전부(물론, 몰아쳐서 놀았던 방학 동안에는 일기마저도 몰아쳐서 쓰는 과업이 되고 만다. 여기에서, 방학 숙제로 일기를 쓸 때, 친구들에게 한 주간의 날씨를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면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였고,  한 달의 계획이라고 해봤댔자 도화지에 동그랗게 큰 원을 그려 넣고, 하루 24시간을 피자 조각을 나누듯이 나눠서 던 '생활계획표'라는 거창한 이름의 한 장짜리의 계획이 전부였다. 거기에 계획이라는 것도 세수하기, 밥 먹기, 숙제하기, 놀기, 일기 쓰기, 등등의 그야말로 계획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하루 일의 나열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 천편일률적인 아니, 기계적인 하루의 반복이 쌓이고 쌓여서 한 달의 계획이 되었던 것이다. 어디에도 근사한 계획이나 목표는 없었다. 물론 큼지막한 종이에 거창한 계획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전의를 불태우는 아이들도 있었다.('나를 포함'이라고 굳이 적는다.) 그것도 번호까지 매겨서 아주 단호하게 굵고 큰 글씨로 또박또박!

그림일기, 혹은 일기장이 아닌 수첩이나 다이어리와 같이 갖춰진 문물을 접하는 것은 중학교 이후의 일이었다. 숙제 검열을 받듯 약간의 작위적이면서 의무적이던 기록이, 그때부터는 차츰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나만의 작은 세계를 갖게 되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유년시절의 정형화된 계획표가 어른의 다이어리로 갈아타고서부터는, 생활계획표의 '세수하기'가 '10시 줌 미팅'으로, '밥 먹기'가 '12시 애슐리 점심 약속' 등으로 세분화되고 구체화되었다.

튼튼한 어른이 되었으니, 계획들도 튼튼한 골자를 갖추게 되고, 인과관계가 분명한 일정들로 채워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고 일반적인 수순이었.

다이어리는 숙제 검열을 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그려 넣던 유년의 생활계획표가 아닌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일정부터 중요한 계획에 이르기까지  하루, 혹은 한 달, 1년 간의 시간들을 기록하는 자신만의 인생수첩인 셈이다. 매일 쓰는 일기를 대신해, 한 사람의 역사가 되기에도 충분한 사료(私料)로서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일기처럼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지만, 그날그날의 일정을 기록하고, 그 밖에도 중요한 키워드를 기록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과거의 한 시점을 되짚어보며 내가 무슨 일들을 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일 년을 시작하는 1월엔, 한 해의 거창한 계획도 세우게 되는데 나의 경우엔, 아라우 카리아(호주 삼나무) 키우기, 펀드 계좌 개설하기, 새로운 취미(드론, 사진) 갖기, 책 이벤트 기획하기 등의 아주 사소하면서 거창할 것도 없는 계획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매번 빼놓지 않고 세우는 계획 중의 하나가 '한 해 동안 책 몇 권 읽기'인데, 이것이 또 성공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80권, 70권으로 적었다가 올해 급기야는 50권으로 하향조정을 했는데도, 현재의 패턴으로 볼 때 30권 읽는 것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는 일이 습관이 되어있다고 믿었는데, 1주일이 가도록 한 페이지도 안 읽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의식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억지로 읽게 되면 집중이 잘 안되고 흐름이 끊기기도 한다. 그나마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적어놓다 보니 약간의 부담감과 의무감을 갖게 되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각화를 시키는 것이 계획을 실현해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 밖에도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생일을 표시해 둔다거나, 기일을 표시하거나 한 달을 기준으로 회비를 내는 날과 공과금 내는 날(아직도 나는 자동이체보다는, 다이어리에 표시된 날짜에 기일 입금하는 수고로움을 자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약속이나 행사를 적어둔다.

일과 관련해서는 따로 탁상달력을 두고 거기에 연수 날짜와 같은 중요한 일정이라든가, 그날그날의 'to do list'를 기록한다.

2021년 나의 다이어리

책을 읽다가 발견한 명문장이라든가 공감되는 단락을 옮겨 적기도 하고, 사고 싶은 물건들의 목록이나, 읽고 싶은 책 제목 등을 생각났을 때 재빨리 적어둔다. 

하루 동안 무슨 일을 했었고, 어떤 중요한 일들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키워드만 메모해놓기도 한다. 거창하게 일기를 쓰는 정도까지의 정성은 없지만, 그 간단한 메모만으로도 중요한 일정을 놓치지 않고 챙기는 일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다이어리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하다. 어떤 기준으로 디자인을 선별하고, 어떤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내 경우처럼 가방에 매일매일 챙기는 물건 중 하나인지, 그리고 자신만의 정리 노하우라든가, 활용 꿀팁까지도 무척 궁금하다.

물론 꼭 다이어리가 아니더라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한 최첨단의 방식으로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나는, 팬시점에서 애써 고르고 고른 필기감 좋은 펜으로 애써 종이를 넘겨가며 일일이 기록하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중간중간 밑줄도 긋고, 빨간 별표도 그리고, 중요도에 따라 표식을 달리해가며 깨알 같은 글씨들로 채워가는 1차원적인 방식이 훨씬 좋다. 


숙제를 잘해가면 노트에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받을 수 있었던 유년의 어느 때처럼 누군가로부터 검사를 받고 나의 공로를 인정받을 일은 없겠지만, '기록한 자만이 해독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다이어리를 펼쳐 들면 그 순간 마음이 정말 편안해진다. 단순히 나의 일정을 확인하는 일 외에도, 뭔가 암호화된 수식이 가득한 비밀노트를 펼치듯, 혹은 보물이 감춰진 보물지도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다이어리는, 나만의 특별한 주얼리와도 같다. 나의 1년을 잘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보석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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