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작업실
성훈이의 하루
어지간히 배가 고팠나 보다. 8살 성훈이, 돈이 있어야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다는 건 아는데 오늘 성훈이에겐 돈이 없다. 성훈이는 보통 엄마와 같이 와서 매번 카페에 들러 간식을 사 먹는다. 성훈이가 ‘나 이거!’라고 손가락을 가리키면 어머니께서 곧 잘 다 사주시는 스타일이다. 늘 비슷한 시각 하교 후 작업실을 찾는 성훈이가 오늘도 배고픔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 같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늘은 성훈이가 엄마 없이 혼자 공간을 찾았고, 배가 고팠던 성훈이 머릿속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바로, 뭐든지 다 만들 수 있는 이문238 작업실에서 돈을 만들기로 생각한 것이다. 아직은 모든 감정을 목소리의 크기로 나타내는 것 같은 에너지 넘치는 8살 성훈이가 " 썬쌩님!!!!! 이거 봐~~~~요! 뫈!!!원!!!! "이라고 목청껏 외치고는 달려와 눈을 반짝반짝거린다! 안 볼 수가 없다.
뭔가 재료가 아닌, ‘어디서 났니…?’ 싶은 책상 부품 은색 금속 위에 검정 펜으로 10000이라고 적어 놓았다. 윽. 고장 난 부품에 “아 그게 뭐야?! 그거 (안 지워지는) 네임펜이지?!”라고 내가 ‘으이그’ 하는 마음으로 말했는데 늘 밝은 성훈, "아니에요! 매직이에요!"라며 활짝 웃는다. (안 지워지는 건 똑같음;) 나도 그저 웃고 넘어갈 수밖에… 그래도 성훈이 역시 이건 만원이 아니지 싶었나 보다.
자리로 돌아가서 조용하다 싶더니 조금 있다가 씩씩하게 다시 카페로 온다. 이번엔 "선생님 저 이거 주세요!" 하며 간식을 사 먹는다며 돈을 내미는데 이번에는 종이에 여전히 삐뚤빼뚤 숫자로 10000이라 적혀있다. 그래. 8살인 네가 10도 아니고 10000원을 금속이 아닌 지폐 재질을 생각해내어 종이에 또박또박 적은 게 기특하다. 그 귀여움 넘치는 기특한 성훈이에게 못 이기는 척 간식을 내주고 싶지만, 나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의 눈길이 무서웠다. 같은 8살 윤범이가 특히 같이 와서는 "이거 정말 쓸 수 있어요?" 눈을 초롱초롱거린다. 뭔가 혜안이 없을까. 으으으 내가 8살 땐 어땠더라…?!
“성훈아 이게 니 돈이야? 오. 그 돈으로 저기 가서 과자 좀 사 오는 거 어때?"라고 말하고는 창문 밖 슈퍼를 가리켰다. "저기 가서 그 돈으로 와플 사 먹는 거 어때?" 그냥 이건 돈이 아니야 하고 얘기해줄 수도 있었지만. 얘가 지금 나한테 장난을 치는 건지 진짜 8살이 이렇게 어린 건지 헷갈리기도 하고, 성훈이 눈빛이 너무 진정성이 있어서 뭔가 얘가 종이돈을 그리고는 쓸 수 있다고 믿는 게 신기해, 슈퍼로 보내서 현실을 마주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나를 상대로 한 장난일 거라고 믿고 슈퍼에는 안 갈 거라 생각했는데 윤범이까지 같이 따라나선다. 아 이건 뭐지. 8살이 이리도 어린 거였나. 애들끼리 나가는 걸 막을까 하다 창밖으로 살짝 지켜보기로 하고 애들이 하는 대로 가만 내버려 뒀다.
한 참 후 손에 종이돈을 그대로 들고 들어온 아이들… 실망 가득한 마음에 가게들을 돌아다니느라 힘이 들어 배까지 더 고픈가 보다. 모르는 척 "왜 무슨 일인데 이렇게 힘이 없어? 그 돈은 안된대?" "네. 아줌마들이 어이없어하셨어요.” 뭐야 얘넨 어이라는 말은 아는데 대체 왜 돈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지. 어쩌지. 우린 애들 하나하나 다 챙기면서 교육해 주는 공간이 아닌데…그래서 또 모르는 척. “아 그랬어? 왜 그런지 알아봐야겠네. 나한테 만원 지폐가 있는데 너희가 그린 거랑 뭐가 다른지 한번 잘 볼래? 내가 만원을 빌려줄 테니 작업대에 가서 다시 보고 한 번 똑같이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사실 아이들의 반응이 재밌어 어떻게 그다음 이야기가 나올지 보고 싶어 마침 바지 주머니에 있던 만원을 꺼내 주었다.
돌려주기로 약속을 한 건 정말 곧잘 지키는 아이들. 그런데 윤범이와 성훈이가 서로 지폐를 쥐고 먼저 그리겠다고 난리다. 엄한 지폐가 찢어질까 겁이 나 “얘들아 둘이 같이 앉아서 앞뒤를 각각 그려.”라고 했더니 정말 이럴 수가. 관찰이란 것은 이런 거구나. 성훈이와 윤범이의 눈에서 레이저 빔이 나올 지경이다. 둘이 돈을 열심히 만드는 동안 난 카페 카운터로 다시 돌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 시간이 흐르긴 흘렀다. 기쁨에 달려온 아이들이 보여준 만원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만원을 닮고자 노력했으나 여전히 8살이 그린 예쁜 그림이었다. 그림이 내 마음에 쏙 들어 나의 진짜 만원과 바꾸자 할 뻔했지만 여전히 이글거리는 다른 아이들의 눈빛에 얼른 내 만원을 다시 챙기고는 완성된 새 돈을 가지고 피카추 돈가스를 파는 문구점에 달려가는 성훈이와 윤범이를 뒤따라갔다.
문구점 사장님, 기가 막히고 바쁜데 너무 귀찮으시다. 성훈이는 역시 사고 싶은 것도 많다. 사장님은 귀찮으시겠지만, 성훈이에게 이게 왜 돈이 안 되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돈은 조폐공사에서 찍은 것만 쓸 수 있어." 정답! 그런데 이 아이들이 조폐공사를 알까…? 아이고 머리야. 사장님을 귀찮게 하기도 하였지만, 아이들의 실망감을 눈감기가 그래서 다 같이 내 진짜 돈으로 간식을 사서는 동네 평상으로 갔다.
이걸 왜 사 먹고 있나. 그래도 오랜만에 문구점 표 간식을 아이들과 함께 먹으며 질문들을 이어갔다. “너희 오늘 돈에 대해 궁금하겠네. 그리고 너희가 오늘 나한테 간식을 얻어먹는 건 이문238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선택인 거 알지? 외부 음식이 안 되는 이문238에 들어가서 이 간식들을 못 먹는 건 그런 이유야.” 이럴 땐 말을 정말 잘 알아듣는다.
눈앞에 이문동 풍경이 펼쳐집니다.
‘아- 이번 관찰일지는 좀 기네?’ 생각한 것도 잠시, 어느새 글 속으로 폭 빠져듭니다. 작업실에서 돈을 만들 생각을 해내고 ‘반짝’ 빛났을 성훈이의 두 눈, 두근두근 슈퍼를 찾아 작업실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 어이없었을 문구점 사장님의 표정, 그리고 모든 여정이 끝난 후 동네 평상에 다리를 달랑이며 쪼르르 앉은 아이들 이마에 살랑 부는 바람. 글과 함께 그날의 이문동에 다녀온 기분입니다.
관찰일지를 써본 적 있나요?
초등학교 때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벼 관찰일지를 꽤 열심히 쓰곤 했습니다. 작은 초록 잎에 쌀알이 맺히기까지, 벼의 수십 가지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무당벌레가 앉은 모습부터, 햇빛 받을 때의 투명한 연두, 쌀알이 맺힐 듯 말 듯 한 모습까지. 참 신기했던 건, 관찰일지 한 권을 다 채우고 나서 다시 일지를 펼쳐보았을 땐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날씨나 기분까지도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이었어요.
나의 눈에 담긴 아이의 하루를 기록해보세요.
우선 편안하게 턱을 괴고 느긋한 관찰자의 눈으로 한 걸음 물러서 아이를 바라보세요. 아이가 언제 눈을 반짝이는지, 무엇에 집중하는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 그리고 보이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담아보세요. 메모장도 좋고, 음성 메모도 좋고, 사진이나 영상도 좋아요.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그 소중한 순간의 기록은 관찰자와 아이 모두에게 오래오래 따듯하고 단단한 힘으로 남을 거예요.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아이들의 작업실을 운영하며 기록한 5년 동안의 관찰일지. 사소하고도 소중한 우리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여러분과 나누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