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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침잠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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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항녀 Jul 07. 2024

인위(人爲)

“여보, 오늘 병원 가야 해. 빨리 나와.”


427일 전 병원 가서 주사를 맞고 주기가 돌아와 다시 병원을 가야 하는 날이다. 이 40대 후반의 부부가 다니는 병원은 ‘유지클리닉’. 호르몬을 이용해 사랑을 유지시켜 주는 클리닉이다.


이 클리닉에서는 대뇌의 미상핵 부위(본능을 관장하는 시상하부 부위 중 일부)가 활성화되도록 하여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켜 주는 주사를 맞을 수 있다. 그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 ‘열정적 사랑’을 유지시켜 준다. 과거의 성장 호르몬, 성 호르몬을 주사로 맞던 것과 비슷하다.


사랑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 열정적(Eros) 사랑
• 유희적(Ludus) 사랑
• 동료적(Storge) 사랑
• 논리적(pragma) 사랑
• 소유적(mania) 사랑
• 이타적(agape) 사랑

이상적인 부부는 시간이 흐르며 ‘열정적 사랑’에서 ‘이타적 사랑‘으로 사랑의 모습이 변한다.


이 도파민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경우는 둘 중 하나가 알고 보니 ’ 열정적 사랑‘이나 ’ 유희적 사랑‘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인간이거나, 이상적으로 ‘열정적 사랑’이 ‘이타적 사랑’으로 변화된 사랑을 하고 있지만 익숙함보다 서로에게 가슴 뛰는 순간을 즐기고 싶어 맞는 경우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부부는 전자의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이혼이라는 법적인 제도를 이용하면 되겠거니 싶겠지만 이혼을 할 경우 그들의 안락한 삶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에 이 주사를 택한다.


이 부부는 남편의 외도가 문제였다. 두 번째 외도까지 다행히 아내가 발견을 했고 남편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본인의 마음이지만 조절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이 부부는 ‘유지클리닉’을 찾게 된 것이다.


이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부부가 살고 있는 22세기, 지구 전반을 움직이는 종교의 중간관리급 이상이었다. 지구 역사상 과학기술이 최고도로 발전한 상황에서 지구 전반을 종교가 움직이게 된 것이 무슨 일인가 싶을 것이다.


2087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의 기존 종교가 무너지며 믿음을 삶의 지지대로 삼고 있던 사람들, 국가들이 흔들렸다. 종교가 흔들리며 이와 함께 정의, 노력과 같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들도 흔들렸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무의미함, 정의의 부재, 혼란을 느끼며 자살, 살인과 같은 인간을 해치는 일들이 많아졌고 역대 그 어떤 끔찍한 홀로코스트, 전쟁보다 많은 인간이 사라지게 되었다.


대혼돈이 발생하면 언제나 미소 지으며 틈새를 이용해 떼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몇몇 국가들에서 몇 사람이 모여 매우 단순한 종교를 만들어냈다. 항상 불안함에 떠는 인간들에게 ‘믿을 구석’을 만들어 준 것이다.


A Place of Trust
(믿을 구석)


말 그대로 ‘믿을 구석’의 APoT. 신을 모시는 건 과학이 발전한 지금 시대에는 의미가 없었다. 단순히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 그리고 물질만능주의를 이용해 지불하는 규모만큼 기댈 곳이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종교에 필요한 것은 규율이다. 최소한의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율을 정해두었다. 틀이 있어야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그 틀 속에서 살아 나가야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아니까.


과거의 종교들과 비슷하게.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등 시대 흐름에 뒤쳐진 것들은 모두 삭제했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들을 우선으로 세웠고 그중에 불륜이 있었다. 불륜은 직접적으로 타인이 받는 피해는 없었지만 불쾌하고 재미있는 나쁜 가십거리였다.


이 종교가 전 지구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인터넷. 일반인이든 공인이든 상관없이 고발은 인터넷에서 이루어졌다. 지구 어디든 연결돼 있는 인터넷을 통해 ‘공개처형’하는 것이 법적 처벌보다 정의롭고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매우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고발당한 개인은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수치심과 신상털이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백분 활용하여 만들어진 APoT의 간부 중에 427일 만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을 그 부부가 있었던 것이다. 자연적으로 생성된 호르몬의 농간 따위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은 종교인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도 치명적이었다. 사회적 매장은 물론이요, 헌납금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풍요로움도 포기할 수 없었다.


도파민 호르몬 주사는 개인별로 주기가 달랐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른 이유와 동일하다. 이 호르몬 주사 하나로 과거 아내와 연애하던 초창기처럼 그녀 하나만을 위해, 그녀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지고 갓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을 떠올려보자. 얼마나 우리가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식었을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유혹을 겪어야 하고 지루함을 이겨내야 하는지.


‘사랑은 호르몬의 농간’이라는 말도 이제 과거의 얘기가 되었다. 인위적으로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했다.


이 얼마나 살기 쉬운 세상인가. ‘진심’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걱정하지 말자.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


아,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해서 안될 것은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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