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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갱B Jul 16. 2024

연습을 시작하며

악기 앞에 앉는다. 또는 악기 케이스를 연다. 악기에 따라 희뿌연 송진 냄새가 스치거나 잘 건조된 나무 냄새, 퐁실하고 부드러운 펠트 해머의 냄새가 옅게 난다. 습한 날이면 조금 더 진해진다. 감성에 잠길 새도 없이 오늘 넘어야 할 음표가 넘실대기 때문에 악보를 펼쳐본다. 음표가 악기 위로 와장창 쏟아진다.  


쓸려온 음표들을 하나씩 집어 물도 없이 삼켜본다. 하고 싶지 않은 곡을 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이곳에 앉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손가락을 찢어 벌리고, 변화하는 화성과 넓은 음역대에 체력적으로 한 번 치는 것조차 벅찬 곡들. 해야만 하는 곡은 소리부터 내기 어렵다. 좋은 소리. 작곡가가 원하는 소리. 악기에서 낼 수 있는 최상의 소리. 소리. 소리. 소리. 지겹다. 생각을 멈추기로 한다.


직업으로 연습에서 나의 마음 상태는 그닥 중요하지 않으므로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로 연습을 시작한다.

*스케일 scale : 음계. 모든 악기 연습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음을 정해진 방식으로 나열된 것(예 : 다장조의 경우 도레미파솔라시도시라솔파미레도) 4옥타브로 상행(도레미파솔라시도), 하행(도시라솔파미레도)을 연속으로 하는 것. 흔히 피아노의 경우, 하농 39번 곡을 말한다.


**아르페지오 arpeggio : 분산화음. 화음을 한꺼번에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분산시켜 소리 내는 것(예 : 다장조의 경우, 도미솔도솔미도) 아르페지오 역시 4옥타브로 상행(도미솔도), 하행(도솔미도)을 연속으로 하는 것. 흔히 피아노의 경우, 하농 41번을 말한다.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는 12개의 장조와 12개의 단조로 이뤄져 총 24개의 조가 있는데 모두 연습하는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습하는 곡의 조성만 한 두개하는 것이 전부다. 낭만시대나 현대곡을 연습해야하는 날이면 이 연습들이 무의미할 정도로 조성이 바뀌기 때문에 해야 할 조성이 너무 많아 기본 연습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삼아 하지 않기도 한다. 실은 안하는 날이 더 많기도 하지만, 옆 연습실의 소리를 듣자니 한 번 괜히 해보고 싶어진다.


‘이제 진짜 연습해야지.’


대충 마음가짐만 잡는데만 20분은 걸린다. 직업으로 연습이라는 말이 머쓱해진다. 원래 뜸 들이는 시간이 있어야 음식에 맛이 돈다고 한다. 음식 솜씨가 좋으신 여사님의 말씀을 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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