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테스트기는 고장이 아니었다
11.
이식한 날은 집에 가서 쉬었다. 아침부터 병원까지 왔다갔다 하느라 피곤하기도 했다. 그 다음 날부터는 그냥 예전처럼 일상생활을 했다. 이틀은 누워만 있는 사람도 있다는데, 평소대로 움직이는 것이 착상에 더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그쪽을 믿기로 했다. 어차피 풀코스 마라톤을 뛰는 것도 아니고,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가벼운 요가와 운동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요가도 했다. 중요한 건 평소처럼 생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무리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8월엔 일이 많았다. 코로나로 인해 밀렸던 행사와 사업이 6월부터 재개됐다. 여름이라 코로나가 약간 주춤한 틈을 타 하지 못했던 일을 해치워 나갔다. 공연, 수업, 강의, 각종 모임, 도시탐사대 활동까지. 월요일에 이식을 하고 그 주 주말에는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배가 콕콕 쑤신다거나 가슴이 아프다거나 한다는데, 나는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 그저 졸렸다. 안 자던 낮잠을 잤다.
배아 이식 후 매일 임신 테스트기를 해서 노트에 붙여가며 진해지는 두 줄을 관찰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이 임테기는 나중에 해보라고 했다. 그동안 내 손을 거쳐갔던 수많은 임테기의 단호한 한 줄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었을까. 1차 피검사는 8월 12일 수요일, 이식으로부터 9일째 되는 날이었다.
5일 배양 배아는 이식하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임테기로 착상 여부를 알 수 있다길래 10일에 임테기를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생리가 하루이틀 늦어질 때면 호기심에 혼자서 해보곤 했는데, 이번엔 남편이 같이 보자고 해서 남편이 퇴근하고 저녁 때서야 해봤다.
결과는 흐릿한 두 줄.
처음부터 대조선만큼 진하게 나오는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그래도 대조선 옆의 선명한 핑크색 줄이 임신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두 줄이 신기했다.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은 예상했단다.
너 주말에 낮잠 자는 거 보고 왠지 됐을 거 같았어.
아무튼 성공하니까 기쁘긴 한데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하고 그랬다. 정말로 엄마가 된다고? 내가? 이렇게 한 번에 성공해도 괜찮은 걸까?
다음 날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더 해보고 수요일 아침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해봤다. 선은 갈수록 진해졌다. 다시 봐도 신기했다.
수요일, 피검사를 하러 C병원을 방문했다. 피검사는 1차, 2차 총 두 번 이루어지고 1차 때는 채혈과 소변 검사를 함께 한다. 채혈도 소변 받기도 이제는 익숙하게 해내고 진료 시간. 초음파를 안 봐서 그런지 왠지 수월하게 진료를 보러온 느낌이다. K교수님이 묻는다.
소변 검사 했어요?
네? 네(하는 거 알면서 왜 물어보지?)
결과 어떻게 나왔어요?
네?
방금 소변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를 내가 어떻게 알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좀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고 있으려니 호통이 떨어진다.
집에서 안 해보고 왔어요?
그제서야 교수님이 말하는 ‘소변 검사’가 집에서 으레 다들 해보는 임신 테스트기 소변 검사임을 알았다. 아니 그럼 테스트기라고 하셔야지 방금 보고온 소변 검사랑 헷갈리잖아요 교수님.. 하려다 투정은 삼키고 빠릿하게 대답했다.
아, 네. 임신 나왔어요.
그러네요.
아니, 아시면서 대체 왜...? 누굴 놀리나 싶었지만 꾹 참았다. 방금 병원에서 했던 소변 검사도 단순히 임신인지 비임신인지 알기 위한 것이었음을 이 때 알았다. 보통 우리가 집에서 쓰는 임테기는 임신을 하면 분비되는 hCG호르몬을 소변 속에서 측정해 임신 여부를 알려준다. 채혈을 하고 확인하는 숫자로 hCG호르몬이지만, 정확한 수치를 알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진료시간에 맞춰 좀 더 빠르게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해 소변 검사를 본 것이다.
진료는 1분도 안돼서 끝났다. 임신이라고 나오긴 했지만 그동안 숱한 후기들을 통해 테스트기의 두 줄이 꼭 임신과 출산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교수님도 축하한다거나 기뻐하는 안색이 없었다. 그렇게 무언가 약간의 찝찝함을 안고 병원을 나왔다. 그래도 여전히 간호사는 친절했다.
피검사 결과는 오후 2시쯤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이른 점심을 먹고 서울역 마트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전화가 왔다. 12시 30분쯤이었다. 1차 피검사 수치는 100 이상을 안정권으로 본다. 긴장이 됐다.
여보세요.
네. 이**님 맞으시죠? 여기 C병원 서울역센터인데요.
네.
피검사 수치가 478.9가 나왔어요.
꽤 높은 수치다. 쌍둥이인가? 생일이 지나고 배아 2개를 넣어달라고 한 부탁이 통했나? 우리의 스노우베이비들은 둘 다 살아남았나? 기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알겠다고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한 간호사는 기쁜 소식이라 밝은 목소리였는데, 내가 너무도 무덤덤하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무던하고 리액션 나쁜 여자라서. 다음부터는 좀 기쁜 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2차 피검사. 3일 후에 보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일주일 후에 갔다. 아기집이 보일 시기라 초음파를 먼저 봤다. 전에는 난포 크기를 확인한다던가 자궁내막 두께를 본다던가 하느라 병원에 올 때마다 보던 초음파였는데 왠지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2개 이식하셨어요? 초음파 보는 분이 물었다. 네. 초음파실 모니터 위로 까만 점 두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기집이었다. 꼭 길쭉한 수박씨 같기도 했다. 까만 점 위에 숫자가 적혔다. 1, 2. 쌍둥이였다.
초음파실에서 사진을 출력해줬다. 쌍둥이라서 사진이 여러 장이라 꽤 길었다. 들고 나오는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난임병원이었다. 임신 성공을 알리는 초음파 사진은 훈장 같으면서도 괜히 마음이 쓰여 섣불리 내놓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기(집) 사진을 아무렇게나 쑤셔넣을 수는 없어 구겨지지 않게 접어 손 안에 넣어 나왔다.
이번에도 덤덤한 K교수님의 진료가 끝나고 역시나 기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서울역 주변을 배회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2차 피검사 수치를 알리는 전화였다. 이번엔 좋은 리액션을 보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전화를 받았다.
수치가 17,241이 나왔어요.
네. 감사합니다!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간호사는 1차 피검사 수치를 얘기해줄 때처럼 기뻐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는데, 어쩌면 내 이름 옆에 (리액션없음)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아닐까? 기쁜 소식을 전해도 무덤덤한 사람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나는 최대한으로 노력했다. 내 기쁨의 리액션이 잘 전달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흔히 말하는 임신 주수, 개월수는 착상일로부터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생리일로부터 계산한다. 그래서 임신 여부를 아는 것은 최소한 임신 4주차가 되어서다. 때문에 2차 피검사일은 5주 0일에 해당한다. 5주 0일의 평균 hCG 수치는 4,090. 17,241은 쌍둥이 수치다. 아기집도 두 개 봤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고민 끝에 태명은 하찌와 미쯔로 지었다. 튼튼이 쑥쑥이 찰떡이 이런 건 너무 흔하니까, 가능하면 겹치지 않는 태명을 하고 싶었다. 태아는 된소리를 잘 듣는다니까 좀 센 발음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이식일이 8월 3일이니까 하찌(8)와 미쯔(셋)로 지었다. 남편도 나도 외국어 전공이라 어쩔 수 없다. 엄마도 태명을 듣더니 ‘역시나’하는 표정이셨다.
하찌미쯔는 또 ‘꿀’이라는 뜻이다. 꿀처럼 달콤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하지만 어린 아기에게 꿀을 먹이면 위험하다. 꿀 안의 보툴리누스균은 만 12개월 이전의 영아에게는 치명적이다. 꿀은 돌 이후에 먹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