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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리 Mar 19. 2021

졸업은 갑작스럽게

안녕 난임병원

12.



2차 피검사로부터 일주일 후, 다시 병원을 찾았다.

임신 6주차다. 난황을 확인했다. 난황은 동그란 고리 모양으로 생겼는데, 임신 극초기에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난황이 너무 작거나, 또 너무 커도 아기에게 좋지 않다고 한다.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고 있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 초음파로 보니 전에는 없던 까만 아기집 안에 과연 동그란 고리 모양이 보이고, 그 바로 옆에 아주 작은 점이 보였다. 잘 보이진 않지만 반짝이는 것이 심장이라고 했다. 그렇군요, 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아기는 이제 0.2mm. 1mm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크기다.


0.2mm예요. 아주 작죠.


K교수님은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제 정상적인 난황도 확인했는지 한숨 돌릴 수 있어서인지 웃으며 아기가 아주 작다고 알려주었다. 기분이 좋아보이는 모습은 처음이라 우리는 얼떨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역시나 1분도 되지 않아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이제 2주에 한 번씩만 오면 된다고.


8주차엔 심장소리를 들었다. 아주 우렁찬 두쿵두쿵 소리. 174bpm, 169bpm으로 빠르지만 태아로서는 아주 정상범위에 속한다. 재밌는 게 둘이 심장소리가 확연히 달랐다. 하나가 ‘쿵덕쿵덕’이면 하나는 ‘덕쿵덕쿵’이라는 느낌이다. 이 심장박동의 묘한 리듬 차이는 나중에까지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서, 누가 하찌이고 누가 미쯔인지 잘 구별할 수 있었다.

이때가 그 유명한 ‘젤리곰’ 초음파를 볼 수 있는 시기다. 태아 생김새가 젤리곰처럼 생겨서 다들 그렇게 부르는데, 나는 젤리곰이고 뭐고 전혀 모르고 그 시기를 지나가 몇 달이 지나서야 ‘그러고보니 다들 귀엽다고 찬양 일색인 젤리곰 초음파는 언제 본 거지?’ 싶어 찾아봤더니 임신 8주차 즈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조금 억울(?)했지만 초음파 사진이 어디 가지는 않으니까 뭐. 초음파 앨범에 젤리곰 스티커를 붙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심장소리까지 들었으니까 빨리 난임병원을 졸업하고 싶었는데, K교수님은 ‘책임 A/S’를 중시 여기시는지 졸업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마지막 슈게스트 처방을 받았다. 임신 10주까지 맞아야 한다고 해서 귀찮지만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10주차에도 초음파실에 먼저 들러 얼마나 자랐는지 크기를 체크하고 심장소리를 들었다. 심장소리를 듣기 전에 ‘동영상 안 찍으세요?’라고 묻길래 찍습니다! 찍을게요! 하고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찍었다. C병원이나 대학병원처럼 큰 병원은 초음파실이 따로 있어 남편이 같이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남편은 언제나 초음파 사진 몇 장만 보곤 했는데 이 때 처음 심장소리를 들었다. 원래는 초음파실에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고 적혀 있는데, 옷 갈아입고 또 초음파실에 들어가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들어갔다. 나는 처음엔 미련하게 휴대폰을 꼬박꼬박 사물함에 두고 다니다 나중엔 들고 들어갔는데,  안내문에 적힌 걸 보고 곧이 곧대로 했다간 심장소리 영상도 못 찍을 뻔했다. 역시 하란 대로 다 하면 손해보는 세상인가?

졸업 얘기는 없었고 2차 기형아 검사까지 설명해주길래 그냥 16주까지는 다녀야겠구나 싶었다. 검사는 큰 병원에서 하는 게 더 좋겠지, 하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졸업은 갑자기 찾아왔다. 12주차, 여느 때처럼 초음파를 봤다. 이제 질식초음파가 아니라 배초음파를 본다며 하의를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는 말에 더없이 신났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질식초음파는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12주차에는 목덜미 투명대 검사를 하는데, 3mm가 넘으면 다운증후군 위험군에 속하므로 심화 검사를 받게 된다. 한눈에 봐도 별로 두꺼워 보이지 않아서 흐뭇한 마음으로 잘 통과하겠거니 했는데 재면 잴수록 크기가 크게 나온다. 처음엔 2.3mm였다가 최종적으로는 2.6mm. 그래도 3mm 미만이라 괜찮네 생각했는데 태아의 크기에 따른 백분율로 재면 2.6mm가 아슬아슬하게 위험군에 걸치는 수준이란다. 목덜미투명대에 대해서는 검사 전 많이 찾아봤던 터라, 아기의 자세나 검사자가 어떻게 재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작은 차이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K교수님은 심각한 표정이었고 한동안 초음파 사진을 들여다 보더니 예상치 못한 한 마디를 꺼냈다.


출산병원으로 전원합시다.


목덜미투명대는 재는 사람, 아기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고 지금 딱 경계선에 있으니 출산할 병원에 가서 다시 한 번 투명대를 재보라고 권유했다. 투명대를 재는 건 이 시기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 오늘이나 내일, 가능한한 빨리 방문하라고도 했다. 그렇게 등 떠밀리듯 엉겁결에 난임병원을 졸업했다.


K교수님이 물었다.


다닐 병원은 정했어요?

네.

어디예요?

S산부인과요.

거기 커요?

아.. 네.


대뜸 병원의 규모를 묻는 K교수님. 아마 만 35세라는 노산의 기준점이 되는 나이에 가진 쌍둥이라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응급상황에 대비하기 쉬운 큰 병원인지를 묻는 것 같았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은 강릉에서도 아산병원에만 있지만 S산부인과도 나름 이 동네에선 큰 병원인 편이다. 이때만 해도 쌍둥이 임신부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난임병원에서 임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담당의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하기도 한다는데(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갑작스레 졸업을 맞았다. 분주하게 이곳저곳 다니며 그동안 했던 검사와 시술들에 관한 서류를 한 뭉텅이 받고 비용 정산도 했다. C병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항상 최대 비용을 청구하고 나서 환불을 해준다. 아직 받지도 않은 다음 번 초음파를 미리 결제해준다던가, 시술할 때도 사전에 미리 ‘할 수도 있는 시술들’에 대한 비용을 청구한 다음 시술이 끝나고 안 한 시술에 대해 환불을 해주는 식이다. 특히 자궁경 때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고 자궁 내부를 확인만 했기 때문에 미리 결제됐던 부수적인 자궁경 시술들에 대해 환불을 받았었다. 참 알 수 없는 시스템이다. 시술을 받고 수납 안 하고 도망가는 환자들이라도 있는 걸까?


KTX를 타고 강릉으로 돌아와 출산하기로 한 병원에 갔다. 미리 전화를 해봤더니 오후에는 대기 시간이 좀 길어질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사람이 적진 않았지만 C병원의 한없는 대기에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30분 남짓 기다렸다가 진료실로 들어갔다. 초음파는 따로 보지 않아도 되나 싶었는데 진료실 안에서 초음파를 봐서 신선했다. 초음파가 끝난 후 배에 묻은 젤을 간호사가 닦아주는 것도 감동이었다. 그동안은 진료실과 따로 있는 초음파실에서 배에 묻은 젤을 직접 닦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온화한 어조로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원장님의 말에 C병원을 다니며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결론은 별로 걱정할 필요 없는 수준이니 나중에 2차 기형아 검사 결과 보고 추가 검사를 할지 결정하면 될 것 같다고.  


다음 정기 진료는 4주 후, 16주차가 되는 날로 잡았다. 이제 더 이상 새벽같이 일어나 KTX를 타고 입덧에 시달리며 2시간을 달려 병원에 가 또 2시간 남짓을 대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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