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리 May 17. 2021

카레와 임신과 심박수의 상관관계

카레는 죄가 없어요

14.



건강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다. 물론 쉬이 피곤해질 때도 있었지만,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꾸준히 땀을 흘릴 정도의 운동을 하려고 노력했고, 스탠딩 공연장에서 탈진한 여자아이들이 실려나갈 때도 그냥 ‘발이 아프고 배가 고프다’ 정도의 감상밖엔 없던 나였다. 입원 한 번 해본 적 없었고 위내시경조차 수면내시경이 아닌 맨정신으로 했다. 어렸을 땐 자주 감기에 걸리고 비실대긴 했지만 큰 병치레는 없었다. 그 때 먹은 한약들 덕택인지 스무 살이 넘어서는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 위염과 장염이 때때로 찾아왔지만 그건 무식하게 (술이든 음식이든) 먹어댄 탓이었다.


흔히들 임신 중 겪는다는 ‘이벤트’도 내게는 먼 일이라 여겼다. 임신 중 ‘이벤트’라 함은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닌, 신체에 이상이 찾아옴을 일컫는다.


임신 10주차부터 일이 많아 바빴다. 코로나 때문에 상반기에 미뤄졌던 일들이, 바이러스가 잠깐 주춤한 틈을 타 재개됐다. 오전에 공연을 하고 오후엔 주문진에 가서 수업을 하고 다시 강릉에 와서 공연을 하고, 저녁엔 온라인 강의를 한 날도 있었다.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임신을 하고도 매일 회사에 출퇴근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 쯤이야’라는 생각이 컸다. 일이 가장 많았던 10월이었다.


바쁜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전날 미리 만들어 놓아 하루 묵은 카레는 맛있었다. 내가 언제나 집에서 만드는 카레는 고형 시판 카레에 각종 향신료를 넣고 만든 것인데, 서울에서 카레 장사를 하시는 ‘카레 깎는 노인’님의 레시피다. 그릇까지 싹싹 긁어먹고 만족하며 소파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숨이 찼다. 차분히 심호흡을 하는데 심장이 점점 세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문자 그대로 심장이 그대로 가슴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플워치로 측정한 심박수는 분당 160BPM을 넘어 170, 180, 마침내는 200을 찍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임신하면 흔한 증상인가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긴급 상황에서도 인터넷 검색이 먼저인 디지털 인류다운 행보였다. 흔한 증상인 것 같진 않았지만 영 없는 경우도 아니어서, 어느 임신부가 올린 포스팅에 급격한 두근거림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그녀는 의사에게 ‘120BPM 이상이 30분 이상 지속되면 응급실에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있었지만. 내 심박수는 훨씬 높았지만 이제 막 높아졌을 뿐이어서 조금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 야근을 하려던 남편에게 연락해 집에 오라고 했다. 혹시 정말로 병원에 가야 한다면 혼자서 가기엔 무서웠으니까. 남편은 내 연락을 받고 20분 내에 집으로 왔다. 이럴 땐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집에서 회사까지 금방이니까. 아니, 큰 병원이 적어서 그것도 아닌가?


다행히 심박수는 최고치인 210BPM을 기록하고 조금씩 떨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110에서 130을 왔다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너무 안 걸었나 싶어서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는데 당연히 움직이는데 더 심박수가 낮아질리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엔 110대를 기록해서 그냥 자기로 했다.


그 후로 생각날 때마다 심박수를 체크하는 버릇이 생겼다. 좀 두근거린다 싶으면 120이 나왔고 평소에는 80~100 사이를 오갔다. 병원 정기 진료 때 주치의에게 증상을 상의해 봤지만 내과를 찾아서 심전도 검사를 받아보라는 말뿐이었고 당연하게도(!) 가지 않았다.


그 후에도 밤중에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서 체크해봤더니 200BPM이 나온 적이 있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 저녁에도 카레를 해먹은 탓에 출산 때까지 더 이상 카레는 먹지 않았다. 애들이 향신료를 싫어하나 싶었다. 쌍둥이는 혈액을 두 사람에게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심장이 비대해지기 쉽다는데, 그래서 두근거리는 증상도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16주가 다 돼서는 원인 모를 하혈을 겪는 바람에 일을 죄다 그만두고 몇 주를 누워서 지내기도 하고, 난생 처음 변비약을 처방받아 먹기도 하고, 말기엔 갑자기 간수치가 올라 3차 상급병원으로 전원하는 등 별일이 다 있었다.


그리고 출산한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내려오지 않는 간수치 때문에 계속 병원을 다니고 있으니, 과연 쌍둥이 임신은 예측할 수 없는 일 투성이인 것 같다. 그러니 주변에 쌍둥이 임신부가 있다면 ‘그 때가 좋을 때야’라는 조언은 해주지 맙시다.

물론 낳으면 더 고생스럽기는 해요, 정말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