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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윗라임 Dec 19. 2023

[일상에세이] 아이스 핫초코 같았던 나의 30대

완벽하게 뜨겁거나, 맹렬히 차가울 수 있는 뾰족한 나의 40대를 위해서

 베이징의 시린 바람과 두텁게도 쌓여가던 하얀 눈의 차가운 감각을 뒤로한 채 인천공항에 입국하던 날, 한국에도 갑작스런 추위가 찾아왔다. 캐리어 가득 담아온 건 옷가지 몇 벌 뿐이었는데 얼결에 시린 바람과 눈까지 담아왔나 싶을만큼 나의 등장과 함께 기온이 뚝 떨어진 서울의 공기를 느끼며 괜히 머슥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내가 사랑하는 계절 '겨울'과 '꼭 지금 맛보아야하는 간식'들을 떠올렸고 입꼬리는 쓰윽 올라갔다. 고향에 왔으니,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손쉽게 양볼 가득 추억의 간식들을 넣을 수 있으리라.


 매서운 바람이 휘-이 지나며 몸을 웅크리게 만드는 이 계절, 겨울이 나에게 이토록 사랑스러운 이유는 그가 품고 있는 작고 소박한 따스함 때문일 것이다. 종종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집에 들어와 서둘러 무겁게 걸치고 있던 점퍼와 장갑, 모자들을 내려놓고 보일러를 잔뜩 올려둔 방에 들어가 김이 폴폴 날것만 같은 두꺼운 이불 속에 몸을 맡긴다. 나만 포근히 감싸주는 그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 방금 사온 뜨거운 겨울 간식을 호호 불어 먹는 맛이란,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다. 이것이야말로 겨울만이 가질 수 있는 낭만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그 낭만을 격하게 사랑한다.


봉투에 담아온 붕어빵을 한입 베어무는 순간, 양손으로 잡은 고구마를 조심스레 반으로 쪼개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때, 커다란 호빵을 가득 채운 단팥을 확인하는 그 찰나에 그들이 품고 있는 따뜻함은 하얀 아지랑이가 되어 맛있게 피어오른다.  


'! 마쉬멜로를 동동 띄워 달달하게 녹여먹는 핫초코도 빼놓을 수 없지!'라고 생각하다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겨울에 대해 생각했다. 애매한것 없이 그토록 깔끔한 겨울이었다. 따스한 난로는 데일만큼 뜨거웠고 틈을 파고드는 바람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매섭다.


 그러다 불현듯 겨울에 비하면 밍숭맹숭 이도저도 아닌채 미적지근한 나의 삼십대가 아쉬워졌다. 2023년 12월, 서른 아홉 겨울 초입에 서서 나는 서른부터 시작되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의 삼십대의 기억을 후루륵 되짚어 내려갔다.  


 학생과 딸이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역할을 담당했던 20대를 지나, 30대에 접어들며 나는 회사 소속의 직장인, 사랑하는 이의 아내, 아이들 엄마라는 새롭고도 낯선 세상을 만났다. 딱히 준비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맞닥드린 세계들. 그때 나는, 그토록 다양한 경계들 사이에 다리를 걸쳐둔채 애매하게 서있는 느낌이었다. 그 어느 분야도 충만히 채우지 못하고 부들부들 간신히 떨리는 다리는 다독이며 하루치를 살아냈다. 마치 움찔하면 치우쳐 떨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줄에서 줄타기하는 인생처럼. 스토리, 연출, 배우 연기 등 모든 요소들을 훌륭하게 꽉 채워 선보이는 영화가 호평을 받고 상을 휩쓰는 것처럼, 내게 주어진 모든 역할들을 다 잘해내고 인정 받고 싶었다.


 나로서도, 사회인으로도, 누군가를 위한 존재 모두 멋지게 살아내려 부단히도 노력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얼결에 받아든 이런, 저런 명찰들이 크고 버거워 이리 저리 방황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무언가가 되었다. 마치 커피숍에가서 '핫초코''아이스 초코라떼' 중,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주문할 순서가 되자 당황한 나머지 "아이스 핫초코 주세요!" 외치는 것 같이 우스꽝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달까?


 원하던 직장에 들어갔지만 환상과는 다른 현실을 마주하고 꿈을 잃고 오래도록 헤매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때늦은 사춘기를 맞아 유난히도 까탈스럽고 못되게 굴었다. 사랑스럽게 반짝거리 아이들을 만났지만 때론 내가 없어지는 것이 몹시도 서글펐다.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무턱대고 내버려두기엔 냉담한 현실을 알아채버렸고, 또 현실에 순응하기엔 아직 패기가 살아있었다. 까치발을 들면 닿을 것 같은 꿈같이 흐릿한 무언가는 늘 잡힐듯 말듯 손끝을 스치며 애를 태웠다.


 호기롭게 일년간의 세계여행 일정을 세우고 예산표를 완성했지만 해를 넘기고 돌아왔을때 발디딜 곳 없이 삶이 고되질까 고이 접어 두고 잊은 척했다. 저녁을 먹고는 단지 정원이 아름다운 평탄한 대단지 아파트를 산책했지만, 어둑해지면 비탈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마음속에 품은 낭만은 가득인데 도통 어떻게 펼쳐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내것 같다가도 아닌 것 같아 가슴이 턱 막히는 듯 했다.


 마음은 풍선이 붕 뜨듯 열정을 따라 하늘로 날아오르는데 발은 땅에 딛고 서있어야 하는 요상하고 애매한 상황에 가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던 것 같다. 이것도, 저것도 포기 하긴 싫었고 다 움켜쥐고 싶었. 그래서 이쪽길로도 저쪽길로도 쉽게 발을 내딛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같은 자리를 오래도록 뱅뱅돌며 꽤나 꼬인 스텝을 밟아가는 동안 지독한 멀미에 시달렸던 나의 삼십대. 어찌할바를 몰라 불안해질때면 여기 저기 길을 묻고 다녔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책을 쌓아놓고 뒤졌다. 그리고 신에게 무릎꿇고 기도를 했다.


 그렇게 경계의 중간에 서서 애매하게 발을 걸치고 줄타기하듯 위태롭게 하루를 버텨내는 날들이 있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뜨겁기엔 뒤탈이 염려됐고 과감히 내려놓기엔 아까운 마음이 들었으며, 눈 부릅뜨고 냉철하게 식어버리기엔 타고난 감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이렇듯 아이스 핫초코 같았던, 또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았던 나의 삼십대를 돌아보았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고 싶은데 돌이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그저 안타까워 하면서.


 12월 초입을 맞이한 어느날엔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몄다. 아이를 안고 들어올려 트리 꼭대기에  함께 별 장식을 얹은 뒤, 마지막으로 등을 키니 아이들이 '와'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몽긍몽글하게 말랑해진 겨울 밤이었던터라 감성이 충만해진 탓인지, 그날은 반짝이며 빛을 내는 전구들을 바라며 또 다른 생각을 했다. 그간 제자리 걸음을 했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사십대로 치고 올라갈 디딤돌이 없어 걱정이라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종종 거리며 지나온 내 인생길에도 반짝이는 빛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트리를 촘촘하게 수놓은 작은 램프처럼.


 그 작은 빛 하나가 위로하듯 따뜻하게 말을 건낸다. 여태 몰아붙이기만 했던 스스로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고 토닥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걸 보면 혼란했던 그 시간 속에서도 조금은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는 유연함 또한 네것이 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노랑에서 초록, 파랑, 빨강으로 색을 바꾸고 깜박이며 또 다른 이야기도 덧붙인다. 더 이상  싫은 것 앞에서 무너지듯 화르륵 타버리지 않고 차분히 '노(No)'라고 답할 수 있는 용기가,  어제와 내일 사이에 낑겨 살아내지 못한 오늘을 제대로 만끽하는 '충만함'이, 꼼꼼하게 가계부를 정리하며 숫자에 매몰되는 대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넓은 시야' 같은 것이 나의 세상으로 들어와 있지 않느냐고.


 작게 깜박이던 빛이 모여 트리전체를 환히 드러냈다. 커다란 빛이 어둠에 가려져있던 내 인생을 비추는 것처럼. 이쯤되니 그간 하고재비로 살아오며 물거품처럼 흩어져버렸다고 생각한 소소한 경험들이 굵은 파도가 되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커다란 팔을 펼치고 달려와 나를 안아줄것만 같이.


 맞다. 20대에는 너무 하고 싶은 것이 많아 '도대체 나는 뭐가 되고 싶은거지?'라며 방황했었는데, 방송작가, 광고제작자, 성우, 마케터 등 수 많은 것이 되고 싶었던 나는 사실 '세상에 위로를 전해주는 다정한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다는걸 서른 아홉의 어느 계절에 깨달았다. 함께 음악하는 걸 좋아하고 서사가 있는 극을 좋아해 다음생엔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던 나는 사실 '그저 낭만을 즐길 줄 아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요즘에야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시간은 내가 잡다하게 이것 저것을 하며 시간을 허비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을 때 행복한 사람인지'찬찬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 중요하게 생각했던 잔기술과 있어보이는 경험들 대신, 진짜 나를 사랑하는 법. 오늘을 제대로 살아가며 돌아보는 법을 마음에 단단히 심고 있었다.


 이쯤되니 그간 자신 없었던 불혹의 사십대를 건너갈 용기와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져 안도가 다. ( 그렇듯 언제고 또 흔들리고 쿵 부딫히며 넘어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튼튼히 현실에 뿌리를 내리되 불어오는 바람에도 나뭇잎을 떨구고 흔들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느낌이랄까! 현실도, 꿈도 잡아낼 수 있는 단단함이 점점 견고해지는 느낌이다.


 들려오는 캐롤이 반가운 올해의 끝자락. 삼십대의 막을 내리는 이 곳에서 예전보단 다부진 마음과 여유를 두르고선 마흔을 맞이하러 나와있는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기특한 어깨를 꼭 감싸안아주며 기도를 해본다.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원하는 만큼 충분히 뜨겁게, 짜릿하게 살아가보자고. 어서 결과를 내놓으라고 다그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릴테니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 미적근한 무언가를 내놓느라 분주하게 허둥대지 말자고. 어쩔 수 없이 끌려나와야만하는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닌 그저 내가 원하는 만큼 화끈하게, 시원하게 멋진 인생을 살아보자고! 진짜 멋진 인생은 그걸 아는 지금 이 순간부터 또 다시 시작될 테니 걱정말고 찬란하게 반짝이는 40대로 걸어들어가 보자고!


애매했던 아이스 핫초코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이제 안녕! 우린 그저 애뜻한 추억으로만 다시 만나자!


이전 09화 [일상에세이] 내 친구 여름에게, 너의 친구 겨울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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