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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ligitis Oct 23. 2020

초파리 인 더 하우스

 미워하는 사람을 응징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은 사랑으로 질식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신이 심판하니 내가 상처 받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야속하게도 운명은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했다. 오빠는 총명했다. 어른들에게 순종하면 귀여움을 받는다는 것도 알고 성인이 될 때까지 착한 아들이자 모범생으로 살았다. 용의 꼬리가 되느냐 뱀의 머리가 되느냐는 절대적으로 개인의 취향이자 선택이다. 부모님이 정해준 삶에 학교에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눌렸던 스트레스가 폭발하면서 인생의 발목을 잡혔다. 한 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조금씩 미쳐갔다. 조현증으로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나지만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부모님은 잘못 양육한 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희생양을 찾다가 나를 원인으로 몰아세웠다. 조용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이루고야 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졸업을 앞두고 야반도주하듯 결혼식을 하고 한국을 떠났다.


 제민의 방송을 처음 접했을 때 풋풋한 20대 연구원 시절이 떠올랐다. 어쩌면 대리만족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며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어서 매 순간 행복했다. 그리고 팬이자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젊은 친구에게 일차원적인 기브 앤 테이크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시큰둥해질 나이에 아직 사랑할 대상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작은 초파리가 이렇게 나를 두근거리게 하다니. 그런데 영감을 불어넣어주던 뮤즈가 갑자기 사라졌다. 제민의 지도교수는 순진한 연구원을 흔들었다고 비난을 쏟아내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고 괴로워한 것처럼 "너는 그를 사랑하느냐?"라고 누군가 세 번 다시 묻더라도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위나 권력이나 외모 등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본성이 드러날 뿐이다. 강자에 기생하는 사람들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상대가 사장이건 인턴이건 교수이건 학생이건 똑같이 대했다. 그 박애주의 덕분에 오해를 산 경우가 더 많았지만, 성적 소수자로서 세상과 문을 닫으려던 남편의 마음도 얻을 수 있었다. 귀한 것을 얻으려면 희생이 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버릴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 한치의 양보나 희생 없이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은 도둑에 불과하다.


 초식남에게 한 달만에 장문의 메일과 함께 연락이 왔다.


"연선님, 연락이 늦어 죄송합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박사과정을 마무리 짓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지난달 공식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러 연구실에 들렀는데 연선님이 잃어버린 루비 256개를 발견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하늘에 맹세코 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고, 사제간에 서로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죄는 덮기로 했습니다. 학위는 따지 못해서 앞으로 연구원으로 취직은 어려울 것 같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혼인신고부터 하고 여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당분간 여자 친구가 경제활동을 하는데 방송을 계속해야 하나 눈치도 보이고 애써 키운 채널인데 접어야 하나 고민입니다. 참! 흰 눈이 초파리 한 쌍이 지금이면 벌써 두 세대를 지났을 테니 빨간 눈 암컷과 흰 눈 수컷이 반반씩 남았겠군요. 제가 괜한 욕심을 부린 것 같습니다. 자산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큰 실수를 범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초파리를 괴롭히려 돌연변이를 만들면서 실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점 너그러이 헤아려 저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보다 초파리를 사랑하시는 연선님을 뵐 면목이 없어 자숙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반가움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결국 석박사 과정을 접고 결혼을 했구나. 그리고 초식남 TV가 내게 어떤 의미인데, 방송까지 그만두면 안 되는데. 나는 답장을 써 내려갔다.


"제민님, 결혼도 하고 어디선가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잃어버린 루비를 연구실에서 찾았다니 배신감이 컸겠군요.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이전보다 늘어나는 속도는 느리지만 루비는 만들어지고 있고 흰 눈 초파리는 수명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말라죽은 흰 눈 초파리가 안쓰러워 차마 파리지옥에 넣어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한 생명의 사망을 선언하기엔 의사도 과학자도 아닌데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흰 눈 초파리 시체들을 모아 액화질소로 냉동해 두었습니다. 유럽에 있을 때 분자요리에 심취한 적이 있습니다. 제민님과는 다른 용도로 액화질소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같은 재료라도 셔벗, 가루, 폼을 만들면 맛과 질감이 독특해지거든요.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보여주고 싶네요. 그리고 현실이 힘들어도 방송은 계속하셨으면 합니다. 영상 업데이트가 안되니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요. 파리지옥이나 끈끈이주걱 키우는 브이로그라도 틀어주세요. 루비를 팔아서 신혼여행도 가고 기분 전환하는 것은 어떤가요. 기운 내라고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으니 새 아지트로 들러주면 좋겠습니다. 허술한 비밀번호는 바꿨으니 오시면 벨을 눌러주세요."


 21세기에도 내 전철을 밟는 사람이 있다니 너무 슬프고 속이 상했다. 꽃 같은 스물여덟인데 자포자기하기엔 이르다고. 제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얀 눈 초파리를 보여주면 즐거워하지 않을까. 외국에서는 밀웜 (mealworm)으로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든 이색 레스토랑이 인기라는데, 나도 초파리로 메뉴를 구성해보기로 했다. 초파리를 둥글게 잔의 가장자리를 장식한 마르가리타로 시작해서 여러 가지 코스 요리를 스케치해보았다. 초파리 가득한 풀 (pool)과 초파리가 좋아하는 바나나, 포도 등 과일들을 모은 샐러드를 상상하니 혼자서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커트러리와 테이블 장식은 초파리 눈을 닮은 레드와 화이트로 준비해 꾸밀 것이다. 실제로 먹을 것은 아니고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기 위함이다. 내가 준비한 초파리 한상에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동안 생긴 루비를 보석상에 팔아 제민의 결혼축의금도 넉넉히 준비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도 새 출발하기에 나쁘지 않을 거야. 나이만 먹은 어른으로서 위로가 안 되는 잔소리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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