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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Oct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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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미운 사람을 응징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은 사랑으로 질식시키는 것이다. 죄는 오로지 신이 정죄할 수 있으니 미물 인간으로서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현명하다. 야속하게도 운명은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했다. 가족이라는 굴레가 그렇다. 친정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언니는 몇 달 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늘 아쉬운 순간에만 연락을 했다. 몇 년 전 내가 병원에 입원해서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에도 모른척하더니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 손을 내미는 이기심이라니! 얼마 전 유방암이라고 수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내가 미동도 없이 놀라지 않는 모습이 실망스러운 모양이다. 사실 유전적으로 BRCA 유전자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초파리 연구에 집착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언니는 내 이야기를 흘려들으면서 본인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다. 남편이 버는 돈으로 생활하면서도 십일조를 할 때에는 본인 수입이 없어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미친 궤변을 펼치곤 한다. 그렇게 신을 부정하는 그녀를 위해서 오래전부터 나는 무차별적인 사랑을 택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운명에 따를 뿐이다.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하겠어'하고 대담하게 도전하니 말이다. 권위에 순종하면 사회생활이 수월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러기가 싫었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꿰뚫는 눈빛으로 원하는 것은 이루고야 마는 강인함이 익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사회에서도 집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졸업을 앞두고 야반도주하듯 혼인신고를 하고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만난 공동체가 힘들 때 의지가 되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좋은 일은 함께 나누고 슬픈 일도 덜어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나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적들이 많아졌다. 이제는 떠날 순간이 되었음을 직감한 순간이었다. 용의 꼬리로 남느냐, 뱀의 머리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개인의 취향이다.


 초식남의 방송을 처음 접했을 때 풋풋한 나의 20대 연구원 시절이 떠올랐다. 어쩌면 대리만족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새로운 사실을 배우며 변하지 않는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어서 매 순간 행복했다. 그리고 그의 팬이자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린 친구에게 기브 앤 테이크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의 모든 것에 시큰둥해질 나이에 아직 사랑할 대상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작은 초파리들이 나를 이렇게 두근거리게 하다니, 아니 초식남의 열정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던 뮤즈가 사라졌다. 그의 지도교수는 순진한 연구원을 흔들었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었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고 괴로워한 것처럼 "너는 그를 사랑하느냐?"라고 누군가 다시 묻더라도 나는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위고하나 가진 것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호불호가 드러날 뿐이다. 강자에 기생하는 사람들과는 태생부터 다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상대가 사장이건 인턴이건, 원로 교수이건 인턴 학생이건 똑같이 대했다. 박애주의 덕분에 오해를  경우가 많았지만, 성적 소수자로서 세상과 문을 닫으려던 남편의 마음을 얻을  있었다. 귀한 것을 얻으려면 항상 희생이 따른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버릴  있을 , 진정한 사랑을 얻을  있다. 한 치의 양보나 희생 없이 결혼하고자 하는 사람은 도둑에 불과하다고 성경에도 나와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던, 전도유망한 과학도였던 내가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게  사건이었다. 신의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한 달만에 초식남으로부터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베르니 , 연락 기다리셨지요?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박사과정을 마무리 짓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채널을 통해 공지를 보셔 아시겠지만 지난달 공식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러 연구실에 들렀는데 베르니 님이 잃어버린 루비 256개를 발견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맹세코 당신이  짓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고, 사제간에 고소를 취하하 조건으로 서로의 죄를 덮기로 했습니다. 결국 학위는 따지 못해서 앞으로 교수나 연구원으로 취직은 어려울  같고, 코로나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혼인신고부터 하고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당분간 여자 친구가 경제활동을 책임지는데 저만 한가하게 방송을 해야 하나 눈치도 보이는데, 3년을 애써 키운 채널을 접어야 하나 고민입니다. !   초파리  쌍이 지금이면 벌써  세대를 지났을 테니 빨간  암컷과   수컷이 반반씩 남았겠군요. 재물 눈이 멀어 무리한 욕심을 부린  같습니다. 자산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실수를 범한  같아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구를 하면서   번도 초파리를 괴롭히며 돌연변이를 만들면서 실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점 너그러이 헤아려 용서를 구해봅니다. 초파리를 사랑하시는 베르니 님을  면목이 없어 자숙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다. 결국 박사 과정을 접고 어른이 되었구나. 초식남 TV가 내 삶에 어떤 의미인데, 방송까지 그만두면 안 되는데 싶어서 나도 서둘러 답장을 써 내려갔다.


"연구원,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팬데믹에 결혼이라니 역시 현명한 선택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루비를 연구실에서 찾았다니 배신감이 컸겠군요. 저는 마음을 추슬러서 이제 괜찮습니다. 이전보다 번식 속도는 느리지만 루비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초파리는 수명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초파리가 안쓰러워서 차마 파리지옥 (fly hell)에 넣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부질없는 바람이기도 하고요.  생명의 사망을 선언하기엔 의사경찰도 아닌데 적합하지 않은  같아서요. 죽은   초파리들은 모아 액화질소로 냉동해 두었습니다. 유럽에   분자요리에 심취한 적이 있어요. 연구원님과는 다른 용도로 액화질소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같은 재료라도 셔벗 (sherbet)이나  (foam)으로 만들면 맛과 질감이 독특해지거든요.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기법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현실이 힘들어도 방송은 계속하셨으면 합니다. 영상 업데이트가 안되니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요파리지옥이나 끈끈이주걱 키우는 브이로그라도 보여주세요. 되찾은 루비를 팔면 보라보라 (Bora Bora) 섬으로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올  있을 텐데 기분 전환 어떤가요. 기운 내라고 멋진 요리를 대접하고 싶으니  아지트로 들러주면 좋겠습니다. 한남동 대사관로에 있는 공관입니다. 평일 점심때 싱싱한 두리안을 가득 실은 태국 상인이 트럭을 끌고 들르니 찾기 쉬우실 겁니다. 허술한 비밀번호는 바꿨으니 오시면 벨을 눌러주세요."


 21세기에도 나와 같은 전철을 밟는 젊은이가 있다니 너무 슬프고 속상했다. 꽃 같은 스물여덟에 자포자기하기엔 이르다고. MOK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급속냉동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얀 눈 초파리를 보여주면 다시 즐거워하지 않을까. 외국에서는 밀웜 (mealworm)으로 다양한 요리를 만든 이색 레스토랑이 인기라는데, 예술적 감각을 살려 초파리에 영감을 받은 스페셜 메뉴를 구성해보기로 했다. 초파리를 둥글게 둥글게 잔의 가장자리를 장식한 식전주 마르가리타로 시작해서 코스 요리를 스케치해보았다. 초파리 가득한 풀 (pool)에 초파리가 좋아하는 바나나, 포도 등 과일들을 모은 샐러드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커트러리와 테이블 장식은 초파리 눈을 닮은 레드와 화이트로 준비해야겠다. 인간은 시각이 지배적인 동물이니 눈에 보이는 모습도 중요하다. 초파리 코스요리에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동안 생긴 루비를 보석상에 팔아 MOK의 결혼축의금도 넉넉히 준비했다. 이 정도면 지구상의 어디에 가서도 새 출발하기 나쁘지 않을 거야. 나이만 먹은 꼰대같이 무용담이나 도움이 안 되는 잔소리 따위는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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