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나와 낯선 엄마의 조우
지금까지 인생의 절반을 ‘나’와 함께 살았다.
여전히 나로 살고 있지만,
늦은 나이에 임신과 출산은 ‘또 다른 나’를 초대하고야 말았다.
바로 ‘엄마로서 나’다.
엄마
이 익숙한 단어는 얼마나 많은 결을 숨기고 있던가. 엄마를 향한 기대와 요구, 모성애 등은 내가 피하고 싶은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하다.
나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엄마로서 삶. 제대로 떠올려보지 않았던 엄마로서 삶. 여전히 나는 ‘엄마 됨’이 어색하고 어렵다. 모성애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굳건히 믿어왔건만 출산하자마자 그야말로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기를 안은 채 ‘낯선 나’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서고 말았다.
나는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아니면 돌아서야 할까.
작은 사람을 품 안에 꽉 안아보지 않은 나는 차가운 모성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를 바라보면 정의를 내리지 못한 마음이 산란하게 피어올랐다.
마냥 아이가 예쁘지 않고, 마냥 반갑지 않았다. 작은 사람을 알고 싶은 마음과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엉킨 가운데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새벽 수유 이후 책상 앞에 앉는 일이다.
남편에게 수유 바통을 이어받아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수유했다. 뻐끔뻐끔 입술을 내밀며 애원하고, 간혹 거칠게 도리질하는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고, 트림을 시키고, 재운다.
그리고 잠깐 고요한 시간. 새벽과 새벽의 틈에 나를 찾았다. 피곤했다. 잠이 부족했다. 기진맥진했다. 맘 카페에서 “손가락과 손목이 너덜너덜해요.”라는 말을 출산한 지 머지않아 경험하면서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기가 영 불편했다. 그래도 졸음을 물리치며 책 몇 장을 읽거나, 노트북을 켜고 빈 문서를 열었다. 책을 펼친 채 잠들거나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는 날엔 머릿속을 스치는 아무 말이나 썼다. 자판을 두드리던 나는 정말 무슨 말을 내뱉고 싶었을까. 아이 돌봄이란 쉼 없이 나의 입을 열게 했지만, 또 다른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이끌려온 작은 사람의 성장을 바라보며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보고 싶었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무릎을 탁하고 칠 때도 있지만, 대개 늘 살아오던 방식대로 인과관계를 짚어보고야 만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라며 연결고리를 추측해본다.
내가 아이를 낳았는데도 ‘어떤 이유가 필요한 인간’인 셈이다.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까닭, 사유, 내력, 넓은 뜻으로는 존재의 기초.
이유의 사전적 의미를 훑어보다가 다른 뜻을 발견했다.
‘이유(怡愉): 즐겁고 기쁨’.
아이를 낳고 나서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끌어오는 부족한 인간. 그럼에도 크고 작은 이유 뒤에 숨은 또 다른 이유 ‘즐겁고 기쁨’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정확하게 반으로 접히지 않을 것이다. 삐뚤빼뚤하게 접힌 나의 마음을 조심스레 펼쳐보고 싶다. 구겨졌더라도 다시 무언가를 접는 기회를 발견하고 싶다.
어둠과 밝음을
구분하는 경계는
아직 그어지지 않았기에
에이드리언 리치, <미국의 오래된 집으로부터>, ≪시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