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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Oct 31. 2020

200자 원고지 1,612.2매 연재소설을 마치다

 총 40화의 이야기를 하나의 파일로 이어붙이고 나니 정말 그랬다 –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1,612.2매. 시간이 글밥 수만큼 쌓여있었다.

 시작은 네이버였다. 웹소설 공모전을 진행 중이었는데 ‘보통사람 박춘수’를 그곳에서 처음 연재하기 시작했다. 나는 웹소설은 웹에 올리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서야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소설은 그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찾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예심이 마무리될 때까지 나 역시 꾸준히 올렸다. 예심결과는 시원한 낙방. 그럼에도 이미 ‘보통사람 박춘수’의 세계는 열려있었고 내가 그 세계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까지는 그곳의 삶을 성실하게 기록해야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연재한다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완결을 짓는다고 출간을 약속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구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기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나 이 이야기는 반드시 40화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저 느낌으로만, 오로지 느낌으로만 알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흙더미 아래 이미 존재가 확인된 유적을 붓 하나를 들고서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끊임없이 흙먼지를 떨어내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글을 연재할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브런치에 닿았다. 과장을 보태어 말하면 그 기분은 마치 워킹데드 릭이 자신의 일행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를 처음 방문하여 이곳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 감정과 흡사했다 – 다시 밝혀두지만 과장을 보탠다면. 그리하여 나도 나의 이야기 보따리를 이곳에 풀어 좌판을 벌였다. 그것이 지난 6월부터 약 5개월의 기간동안 함께한 ‘홍영’에서의 삶이었다.

 어릴 적 내 방엔 학원사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아마 그 당시조차 지금의 내 나이보다 오래된 전집이었을게다. 초등학교 때는 그 전집이 꽂혀있는 책장이 그저 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책등에 쓰인 제목과 작가 이름만 읽었다. 가끔은 동생과 함께 한 사람이 소설 제목을 말하면 다른 사람이 작가 이름을 대는 놀이도 했다. 전집은 내게 한동안 그런 의미이자 기능만 했다. 그러다 열다섯 살 무렵,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의 사람들’(전채린 옮김)를 꺼내들었다. 그것이 내가 그 전집에서 가장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었다. 그 책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작은 글자크기의 책임에도 잔인하리만큼 두꺼웠고, 둘째는 제목에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 대부분의 열다섯 살들처럼 내 삶은 그 무렵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도망갈만한 새로운 세상이 필요했다. 책의 두께는 어림잡아 내 새끼손가락 세 마디를 모두 합친 것만큼이었다. 그 세상에 녹아들기까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 걸렸다. 그 이후로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오른손에 모아쥔 책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너무 아쉬워서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는 한숨을 푹푹 쉬었던 기억이 난다. 그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나는 이틀 여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지내다가 – 실제로 그러하였으므로 – 박경리의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 역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유명했고, 둘째, 총 16권의 거대한 분량이었다. 그때는 내가 소설 속 세상에 왜 그렇게 빠져있었는지 깊이는 몰랐다. ‘그저 현실이 싫어서 피해있을 곳이 필요해’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써 보니 알겠다. 소설 속 세상은 허구가 아니라 은유이기 때문에 그리도 좋았던 것이다. 소설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자, 동시에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기에 내가 그 세상에 그토록 매료되었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소설은 작가가 자신의 경험, 상처, 고민, 성찰, 통찰을 한데 엮어 이를 새로운 세상에 은유로 풀어놓는다. 독자는 작가가 내어놓은 그 길을 따라 작가가 느끼기를 바랐던 것들을 느끼기도 하고, 더 위대하게는 작가가 미처 의도하지 않은 것까지 찾아내곤 한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은 작가의 글과 독자의 상상력이 만날 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읽혀야 하는 이유이다. 쓰이기만 한다면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 글이 살아있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와 육아의 고단함을 ‘보통사람 박춘수’로 달래셨다는 꿈꾸는 ㅅ님을 비롯한 모든 독자분들이 이 소설을 함께 완성했다. 축하와 감사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비록 나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정식’ 작가는 아니지만 언제고 다시 한번 펼쳐들고픈 세계를 하나 열어두었음을 꼭꼭 정성스레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싶다.  

 홍영으로 잠깐 돌아가보면, 박춘수가 홍영에 내려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과 은옥 아주머니 살인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조각들은 이미 소설 이곳저곳에 남아있다. 이를 맞춰가는 유희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대신 나는 덕구와 보영, 순미 씨, 고 편집장과 김 실장 그리고 박춘수의 삶을 생각해 볼만한 마음들을 놓아두는데 내 소임을 찾았다. 그것이 일상이고, 위로이며, 응원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살며시 덧붙이자면 내가 좋아하는 안톤 체홉의 말처럼 ‘1막에 권총이 등장했다면 3막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 그러므로 3년의 유도영이 나왔으니 우리 모두의 상상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쓰임을 할 것이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인사를 놓아둔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브런치로 소설가 등단을 해 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 결국 문학은 보통사람인 우리 모두의 보편적 감수성을 통해 완성되는 것일테니 말이다.      



p.s. 브런치북에서 새롭게 만나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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