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신념, 건강, 가족 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술자리나 술을 피해왔던 내가 술을 마시게 된 계기는 이랬다.
해외 초빙교사에 합격한 날, 축하 겸 이별 파티로 교장 선생님을 포함한 학교의 남자 선생님이 모였다. 나를 위해 다들 모인 자리이니 참석을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같이 운동은 하면서 술은 안 마셔서 많이 섭섭하셨는지, 교장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이, 교실남! 그래도 오늘 좋은 날인데 한 잔 해야지! 오늘도 술 안 마시면, 앞으로 나 이제 너 안 본다!"
"음... 그래도..."
"야, 뭘 고민하고 있어? 오늘만 그냥 마시자. 괜찮아. 좋은 날이잖아. 앞으로 최소 2년 이상은 못 볼 텐데, 오늘은 마셔야지.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맥주 한 잔이 두 잔, 세 잔이 되고 어느 순간 소맥으로 업그레이드되고 그렇게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 가고... 그날은 집에 기어 들어갔다. 그동안 고고한 선비처럼 술을 거절해왔던 교실남이 술을 먹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이제 마지막인데 술 한잔 하자는 약속이 순식간에 여러 개가 생겼다.
'그래. 이제 곧 한국 떠나는데... 딱 이번만 마시고 다음부터는 안 마시는 거야.'
5~6번의 술자리를 더 가진 뒤, 난 바로 해외로 떠났고 그 이후로 3개월이 지났다.
"자, 이번에는 원샷이다! 남자가 돼가지고 이게 뭐야. 무조건 원샷이지!"
이곳 해외한국국제학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술을 엄청 좋아하셨다. 출국을 하기 전에 몇 번 술자리를 가졌겠다, 술 마시는 분위기 속에 나는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새로운 환경에 잘 녹아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술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어울려 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심하게 현타가 왔다. 다음날 숙취에 절어, 황금 같은 주말 하루를 날렸을 때는 자괴감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한국의 학교에 비해 재외한국학교가 일이 배로 많은데, 이렇게 술까지 마시면 2년 동안 일과 술에만 잔뜩 절어 있고, 정작 중요한 것들은 경험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도 생겼다. 더군다나 3년 동안 지켜왔던 신념과 습관들이 불과 4개월도 안 돼서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술자리를 가는 대신에, 나의 성장과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쓰겠다던 내 다짐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술자리에 참여하지 않고, 온전히 나와 내 가족에게 시간을 쓰던 그때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그동안 계속 술을 마셔온 사람처럼 말이다.
순간 예전에 나와 같은 초등교사인 군대동기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 친구는 군대에 1년 정도 있으면서, 노예처럼 죽도록 일을 하니 마치 태어날 때부터 군인으로 노예처럼 일을 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교사 생활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친구는 전역 후 주변환경이 바뀌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사회에 적응했다.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자 적응의 동물이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환경설정'이라는 단어가 내 머리를 쾅 때렸다.
3년 동안 술을 끊었던 내가 불과 4개월 만에 해외에서 술을 자연스럽게 마시고 있는 것처럼, 26년은 사회인으로 살았던 그 친구가 불과 1년 만에 뼛속까지 군인이 된 것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환경설정을 바꿔주면 어떨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나는 '환경설정'을 통해 지금의 나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나를 바꾸는 첫 환경설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2020~2021년 사이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나를 위한 글쓰기로 스스로 위로받았던 기억, 내 경험을 공유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거나 도움을 줬던 기억, 결혼식 전 쓴 글 덕분에 누구보다 특별한 결혼식을 했던 기억, 글쓰기를 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술을 마시지 않았던 기억, 매일 한 편씩 글을 써 내려갈 때마다 뭔가 해냈다는 느낌에 매일 설레면서 하루를 시작했던 기억들 말이다.
작년부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글을 안 쓰고 있었는데, 어쩌면 글쓰기가 바쁜 일상 속에 찌들어 있는 나의 마음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쓸까 말까 생각만 하다 최근에 실배님의 글을 보고 용기를 얻었고,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았다. 글쓰기 근육이 다 빠져버린 지금의 나에게는 믿을만한 글쓰기 운동 메이트가 필요했고, 때마침 실배님의 글 속에 좋은 글쓰기 모임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미 모집날짜가 지나 걱정했으나, 모임장(이틀)님의 배려로 오늘 막차로 이 모임에 들어오게 되었다.
몇 달 뒤에 지금을 되돌아봤을 때, 글을 안 쓰던 시절은 기억도 안 날만큼 매일글쓰기로 풍요롭고 활기찬 하루하루를 만들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