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간절기라고 답했다. 그런 결정의 계기는 별거 아닌 한순간이었던 거 같다. 대학 2학년 때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의 등굣길. 아침에 수업을 들으러 캠퍼스를 걷는데 딱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긴소매 셔츠 사이로 살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참 좋았다고 생각했더랬다. 아마 그때 뭔가 기분 좋은 일도 있었을 텐데, 바람 느낌 말고, 그 기억은 없다. 간절기는 뭔가를
기대하게 하고, 변화를 꿈꾸고, 그래서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다. 생각해 보면, 생각이 많아지면서 활동도 많아진다. 옷을 사고, 옷장을 정리하고, 집 청소를 하고, 서점에 가고, 운동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런 것 말고 간절기가 좋은 건 개인적인 성격 탓도 있는 것 같다. 아주 춥거나 아주 덥거나, 날씨 말고 어떤 상황이 아주 춥거나, 아주 덥거나 극단으로 가는 걸 힘겨워한다. 자꾸 중간에 어느 지점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하고, 가성비나 가심비나 하는 것들을 동원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결론을 내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혹자는 타협과 공감이라 하고, 혹자는 줏대 없거나 우유부단이라 한다.
산이 앞에 있고, 꽃과 나무를 가꾸는 ‘그레이집’으로 이사 온 후로는 간절기가 더 간절해졌다. 산의 색과 빛이 변하기 시작하면 산책이 잦아지고, 산책을 하다 보면 사색이 깊어진다. 사색은 지식의 밑천이 달리는 나에겐 각종 비타민에 마늘과 감초까지 들어간 링거 주사다. 꽃과 나무를 위해 할 일도 많아진다. 그러면 에너지를 쏟고, 또 에너지를 얻는다. 간절기의 삶은 풍성해진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인가 가장 좋아하는 간절기가 달라졌다. 20대의 기억을 더듬으면 여름과 가을이 만나는 지점이었는데, 이젠 명확하게 겨울과 봄 사이, 요즘이다. 왜 그럴까? 먼저 겨울을 벗어나고 싶은 본능이다. 솔직히 요즘 겨울엔 몸이 움츠러드는 걸 체감한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위의 활동량이다. 체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그러면 그 위를 위해서 음식 섭취를 줄여야 한다. 그러면 몸의 에너지도, 일의 집중력도 떨어진다. 주변에 마음을 더 쓸 여유도 줄어든다.
최근에 산책을 하며 사색에 잠겨 얻은 결론도 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다는 건, 저 앞에 보이는 산 정상에서 이제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내가 하산을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삶과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생명이 움트는 봄이 더 기다려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