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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Sep 18. 2017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르네상스 미술-마사치오-베드로 성인의 십자가 죽음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독백중 가장 많이 알려진 대사이다. 영어원문의 뜻대로라면 사실 ‘실존할 것인가 안할 것이냐 양자택일, 즉 단순한 삶과 죽음의 경계 선택을 떠나 ‘계속해서 살만한 인간 존재의 가치’를 성찰하고 독백하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햄릿은 ‘존재의 상태 vs 비-존재의 상태(a state of being versus a state of not being)를 구분 성찰할 것을 권유한다.


“계속해서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당신의 삶은 살아 갈 가치가 있느냐’의 엄중한 질문을 셰익스피어 배우는 자신의 입을 통해 무대에서 관객에게 한방에 던진다. 던지는 돌에 맞는 것보다 이 대사에 한방맞으면 훨씬 더 아프다. 이는 마지못해 사는 삶, 죽지 못해 사는 삶은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역설적으로 삶의 가치를 더 높이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절대 배신 안하겠다고 떵떵거리며 여러 사람보는 앞에서, 특히 스승인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보란듯이 맹세했다. 그러나 새벽닭이 울기전에 무려 세번이나 계속해서 딱잡아떼며 그분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엄청 통곡을 한 그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눈은 울어서 퉁퉁 부었을 것이다. 눈두덩이 퉁퉁 부은 그가 성령강림으로 충만해져 먼 제국의 수도 로마로 가서 열심히 선교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자 죽음이 두려워 이를 피해 도망가는 중에 스승 그리스도를 길에서 만났다. 베드로는 놀라 물었다. 웬일이냐가 아닌,


‘쿠오 바디스(Quo vadis)?’


문자 그대로 ‘어디로 가시나이까(where are you going)?’이다(폴란드의 소설가 셴키에비치의 소설). 일상의 평범한 질문같지만 ‘로마로 간다’고 한 그리스도의 답변속에 베드로는 눈치챘다. 스승 그리스도는 사자의 소굴인 로마로 죽으러 간다는 말이다. 겁쟁이 베드로는 죽음을 피해 로마를 도망쳐왔는데 로마로 들어간다는 말은 죽으러 간다는 말과 똑같다. 이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베드로는 섰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처음엔 물론 목숨부지하려 도망쳤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 삶은 사실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래서 베드로의 ‘쿠오 바디스’와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의 고뇌는 서로 상통한다.


르네상스 화가들의 고참 선배이며 큰 영향을 끼친 ‘마사초(Masaccio. 1401-1428)’는 겨우 26세 되던해에 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반 고흐’처럼 짧은 생을 산 그였지만 서양회화에 직접적으로  원근법을 도입해 그린 그의 그림등으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였다. 그리고 후대의 쟁쟁한 화가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필립보 리피도 미켈란젤로도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그림 ‘베드로 성인의 십자가 죽음(Crucifixion of St Peter)’은 그가 죽기 2년전에 완성했다. 르네상스 중심도시 피렌체의  옆동네 피사의 성당 제단화 아래 작은 그림, 즉 프레넬라(predella panels)의 한 장면그림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그는 베드로 성인의 순교를 직설적이고 문자 그대로 그렸다. 위에서 언급한 베드로 성인은 박해중의 로마로부터 도망가는 길에 만난 그리스도로부터 로마로 들어간다는 답변에 크게 깨달아 자신도 바로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다시 들어가 장렬히 순교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순순히 죽음을 맞이 한게 아니었다. 스승이자 구세주인 ‘그리스도의 죽음방식’인 십자가 죽음이 아닌 그 반대로, 즉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해달라고 그는 요청했다.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죽는다는 건 감히 그분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며 그래서 똑같은 방식으로 절대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형의 정반대(upside down)로 순교했으며 그가 순교하고 묻힌 곳이 지금의 바타칸 언덕 성베드로 대성당이다.


그림에서 성인의 후광(halo)은 땅에 접시처럼 그려져 있다. 성인의 징표인 후광은 땅에 떨어져도 깨어지지 않은 영성의 거룩한 후광이며 죽어가는 성인의 얼굴을 떠받쳐주고 비추어 준다. 성인의 눈은 아직도 크게 떠있어 십자가형의 고통과 함께 아직 숨이 멎은 건 아닌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시행착오 뒤 깨달음의 경험을 관람자들에게 레이저를 쏘듯 강력하게 전하는 듯하다(최순실 사태의 우병우와 비교말길…). 그래서 햄릿의 배우가 독백하듯, 베드로 성인은 ‘당신의 삶은 계속해서 살 가치있는 삶인가?’하고 관람자에게 독백하는 듯하다. 붉은기가 감도는 그의 피부색은 히브리어 이름 ‘아담(Adam)’이 팔레스타인의 붉은기 도는 흙이름과 어근이 같다는 사실처럼 바로 흙색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일까? 그러나 한 생명이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거꾸로 박힌 상태에서도 크게 부릅뜬 그의 눈을 통해 알수있다. 격심한 고통과 함께 그도 연약한 인간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새벽닭이 울고 난뒤 통곡했던 베드로는 더이상 아니다. 그의 눈은 울어서 눈이 부어있지 않다. 뚜렷하게 진리를 본 뒤라 울 필요가 없다. 그런 그의 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 ‘죽느냐, 사느냐’의 화두는 ‘쿠오 바디스’로 답변되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삶과 죽음의 철학적 신학적 물음을 던지는 생각하는 인간은 무생물인 흙과는 다른 창조물임을 베드로의 삶에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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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cifixion of St Peter’ by Masaccio.1426.

Tempera on panel, 22 x 31 cm

Staatliche Museen, Berlin)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햄릿 역할을 맡아 해골을 앞에 들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독백대사를 하는 것은 모든 배우의 '꿈'이다. 이젠 전설이 된 로렌스 올리비에도 현재 최고의 인기배우인 베네딕트 컴버바치도 그랬다. 위의 사진은 '톰 히들스튼'이 최근에 한시적으로 오픈한 햄릿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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