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서울

by any

나는 서울에서 가장 산책하기 좋은 동네 중 한 곳에 살고 있다. 결혼을 하고 이 곳에 터전을 잡을 때만 해도,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돗자리와 책을 들고 근처에 있는 숲에 방문하게 될 줄 알았다.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사실 우리는 강아지가 오기 전까지, 걸어서 5분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이 숲을 방문한 적이 두어번 정도 밖에 없다.


사실 강아지가 오게 된 가장 큰 계기 중 하나는 우리 집의 위치였다. 집 근처에 이렇게 길게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에 맞벌이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데려올 용기가 생겼다. 하루 중 혼자 있는 시간이 제법 길긴 하겠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즐거운 산책을 하면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하고.


강아지가 온 뒤 첫 산책을 잊을 수가 없다. 집에 온 바로 다음 날, 새벽바람부터 하네스를 차고 (참고로 이 하네스는 전날 찬 그대로였다 - 유기견이였던 이 아이가 첫 날 너무나도 예민하게 굴어서 하네스를 채우는 데만도 큰 애를 먹었고, 그걸 풀었다가 다시 채워준다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준비해 둔 리드줄을 매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숲에 도착하기도 전에 강아지는 갑자기 멈춰서더니 기묘한 자세를 잡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곳은 숲까지 가는 길에 조성된 작은 관광스팟에 있는 인조잔디였다. 그리고 강아지가 작은 몸으로 힘차게 뿜어낸 것은 그냥 똥도 아닌 물똥이었다. 준비해 갔던 배변봉투에 물똥을 담긴 했지만 더럽혀진 인조잔디를 차마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결국 거의 우는 소리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물티슈와 두루마리 휴지를 가득 들고 오게 했다. 아직 내 말을 들을 의향이 전혀 없는 강아지를 옆에 세워 두고, 물티슈로 인조잔디를 박박 닦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 여러 일들이 있었고, 강아지와 심각하게 싸운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항상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한 나만의 약속은 최소 하루 한 번의 산책이다. 사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 - 체감온도 영하 10도 이하, 비/눈 오는 날 - 은 그냥 집에 있는다. 억지로 데리고 나가 봤더니 우리 집의 작은 털복숭이 갑님께서 싫다고 하셨다.

처음에 산책을 갔었을 때에는 집 바로 앞에 있는 숲도 낯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고, 남편과 두어번 산책 왔었던 기억을 되살려 어찌어찌 헤매다 돌아왔다. 강아지는 내 리드에 제대로 따라 오지도 않았다. 대부분 내가 강제로 끌려가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힘차게 뛰었어야 했던 나날들.

그 당시 강아지는 기준을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의식이 있었다. 숲의 특정 위치에는 인도 옆 잔디밭에 낙엽들을 한데 모아놓은 구간이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날때면 강아지는 꼭 인도가 아닌 낙엽사이를 맹렬하게 달려가야만 했다. 계속 그 일이 반복되자, 아예 그 구간을 지날 때면 나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강아지를 따라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전력질주를 했다. 약간 어른이 되어버린 요즘의 강아지는 그러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때에는 왜 그렇게 낙엽질주를 고집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첫 1~2년의 산책은 나에게 있어서 즐거움보다는 의무였다. 회사와 야근에 지쳐 돌아오면 쉬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강아지에게 무언가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억지로 억지로 끌고 나갔다. 숲에는 "이 정도쯤 걸으면 만족하겠지" 싶은 루트가 하나 있었고, 매일 매일 그 길을 돌았다. 같은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서 걸어야만 하는 숲은 지루했다.

생각이 바뀌었던 것은 올해 봄 쯤이다. 그 날 나는 사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후 반차를 내고 모처럼 평일 낮에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익숙한 길을 걷다보니 옆으로 갈라지는 작은 길이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지나쳐 가면서도 가겠다는 생각 자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이 날은 달랐다. 왠지 한 번 같이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진입해본 새로운 길은, 대성공이었다. 산책로를 따라 늘어선 나무에 벚꽃이 잔뜩 피어 있었는데, 신선한 풍경에 나도 강아지도 신났었다. 그렇게 길을 따라 가다가 결국 사슴까지 보고 다시 길을 더듬어 돌아왔다.


그 뒤로는 제법 많은 곳을 함께 다녔다. 길을 가다가 옆으로 빠지는 새로운 길이 있으면, 둘이 함께 가보곤 했다. 강아지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자신이 먼저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때때로 뒤를 돌아본다. 인터넷에서 봤을 때에는 이것이 "안전하니까 너도 와도 좋다"라는 표시라는데, 너무 인간 중심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지만서도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어디든지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당당하게, 그리고 즐겁게 가 주는 강아지 덕분에 덩달아 나도 신이 나서 이곳 저곳을 다니게 됐다.


처음 한강을 따라 걷게 되었던 날도 기억한다. 그 날도 용기를 내어서, 몇몇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샛길을 가보기로 했다. 내리막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니 터널이 나왔다. 이 터널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제법 긴 터널을 더듬어 내려갔다.

터널의 끝에는 시원한 한강이 있었다. 힘차게 터널을 뛰어가던 강아지는 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을 때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킁킁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원한 강바람과, 어둑해지면서 그에 맞춰서 조금씩 색을 바꾸어가는 풍경들. 어느 순간 사방이 보라색 빛에 감싸여 있다고 느꼈는데 그것도 잠시, 곧 어둠이 깔리고 강 건너 편 건물들에는 하나 둘씩 불이 켜진다. 내 털복숭이 친구와 함께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토록 주변 풍경을 심도있게 바라본 것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내가 정말 사랑했었던 풍경. 저 먼 곳에 빛나는 하나의 불빛마다 각각의 이야기가 있고, 사정이 있겠지. 올림픽대로를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차들은 또 어떤가. 먼 곳에서 바라보면 그저 아름답기만 한, 저 빛나는 자동차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저 곳을 지나가고 있을까. 아마 내가 평생 동안 알지도 못할 사이의 사람들이 지금 어떤 상황일까, 어떤 감정을 갖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있는 힘껏 상상해본다. 내 무릎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강아지의 체온이 따뜻하다. 이런 회색빛 하루의 끝자락을 오색찬란하게 물들이는 찰나의 순간에, 네가 나와 함께 있음을 또 한 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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