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원하는 길, 아이가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친구와 집의 가격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엄마 우리 집은 얼마예요? 지훈이네 집은 10억이래요."
아이의 말에 나는 선뜻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아이의 눈빛은 그것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불러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평소 라이벌처럼 지내던 친구라서 매번 오늘은 체스에서 몇 번 이기고 졌는지 브리핑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이 아이에게 집에 대한, 더 나아가 부에 대한 개념을 심어줄 때가 온 걸까?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기 전, 나는 내가 생각하는 집과 돈의 가치를 스캔해 봤다. 나이 서른여섯이 되고도 제대로 된 명품 하나없는 건, 명품에 쓰인 이미지가 곧 내 이미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종종흔들리긴 하지만) 소비에선네이밍보다는 퀄리티나 실용성을 따지고 소유에 대한 기준이 타인보다는 자족하는 내면에 있는 거라고 믿고 있다.
뉴스에서 집값이 연일 떡상한다고 했던 지난 몇 년간, 나도 어서 그 대열에 올라타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심하게 느꼈다. 그럼에도 선택의 문 앞에서 늘 우리 부부는 발을 멈췄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만큼 우리 부부의 기준에 적합한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무주택자이지만 우리는 수입을 현명하게 관리하면서 언젠가 만날 우리 집을 찾는 중이다.
다시 돌아와, 나는 아이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매매, 전세, 월세의 개념을 일러줬다. 집의 가치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방법에 따라 돈이 드는 거라고 말이다. 우리 집은 일정 기간만 사는 집이라 그 친구의 사는 집에 비해서 적은 돈으로 충분히 빌릴 수 있었다고.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못내 아이의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준 게 아닌가 눈치를 살폈다. 필요에 따라 합리적으로 사는 거라 어렴풋이 이해한 아이는 곧 다른 주제로 넘어갔지만 내 마음 한편에 아이의 말이 남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한 가지를 명확히 깨달았다. 아이에게 꾸준히 타인의 기준에서 우리의 삶을 부유하고 가난하다고 논할 수 없다는 걸 일러줘야겠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아이가 열등감을 느낀다면, 반대로 상황이 나아져 더 좋은 거처로 옮길 때 아이가 충분히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영향을 초월해 아이 내면이 단단하고 밝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열과 성을 다해 아이에게 너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존재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고 새겨줄 것이다.
가진 게 많다는 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보여줄 뿐,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말해주는 건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