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의 가을 햇살, 기온이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 아파트 옆 마을을 뛰는 내내 내리쬐는 햇살이 목덜미를 따끔거리게 한다. 하천을 따라 달리기에는 햇살이 조금 버거운 날이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모자까지 눌러써도, 가을 오후의 태양은 자꾸만 내 목덜미를 붙든다. 하는 수 없이, 장지천을 향하던 발길을 돌려 아파트 뒷동산으로 향했다. 이곳엔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 햇살을 막아주는 그림자를 만든다.
내가 사는 도시는 아파트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브랜드의 아파트들이 줄지어 서 있지만, 사실 대형 건설사들이 직접 지은 것은 아니고 브랜드 이름만 빌려주었을 것이다. 이곳은 야산을 개발한 지역이라 낮은 동산이 여러 군데 있었다. 다행히 다 밀어버리지 않고 단지 뒤에 작은 뒷동산을 남겨두었다. 놀이동산을 방불케 하는 뒷동산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나무들이 잘 가꿔져 있다. 아파트 단지 사람들에게 소소한 자연의 즐거움과 운동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나면 이 언덕을 오른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부터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즐기는 이들, 공놀이하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가족들이 벤치에 앉거나 나무 그늘에 모여 서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온 언덕에 울려 퍼진다. 신도시의 매력은 처음부터 이런 자연 친화적인 공간을 염두에 두고 아파트를 설계했다는 데 있다. 요즘은 아파트 내부 공간도 중요하지만, 주변 환경을 얼마나 잘 조성했는지도 사람들에게 중요한 선택의 요소가 되었다.
장지 마을을 돌아 아파트 뒷동산으로 들어섰다. 발밑에 낙엽이 수북이 깔려 있고, 파란 하늘 아래 단풍이 한창이다. 울긋불긋한 가을 풍경 속을 달리다 보니 종아리가 뻐근해졌다. 근육이 뭉쳐졌나? 살짝 긴장했지만, 차츰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며 걱정을 덜었다. 그럭저럭 한 시간을 달리고 나서 마무리 체조를 했다. 긴 호흡을 하며 상큼한 가을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달리기를 마치고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을 찬찬히 살폈다. 오호라 나무에 붙인 이름표가 눈에 들어온다. 이거 참 친절하고 세심한 배려다. 산을 오르거나 길을 갈 때 단풍이 곱게 물든 나무를 보면 늘 이름이 궁금했다. 제법 알려진 나무야 이름을 알고 있지만, 사실 긴가민가하고 헷갈리거나 이름을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 가끔 스마트폰으로 이미지 검색을 해보곤 하지만, 아직 정확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지니 흥미를 잃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왕벚나무이다. 봄에 화려한 분홍색 꽃이 피는 나무로, 도시의 가로수로 많이 심겨 있다. 봄철, 왕벚나무의 분홍색 꽃잎이 몽환적이다. 잎 모양은 주로 타원형으로 길쭉하고, 잎 가장자리에 울퉁불퉁한 톱니 모양이 많다. 가을에는 붉은색을 띠는 노란색으로 변해 아름다운 가을을 장식한다. 일조량이 줄어들어 잎 속의 엽록소가 힘을 잃으면 카로틴과 크산토필의 붉고 노란 색소가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산딸나무도 보인다. 넓은 계란형의 잎 가장자리에 있는 톱니들이 특징이며, 봄에는 연분홍색 꽃이, 여름엔 붉은 열매가 달려 관상용으로도 인기다. 가을엔 안토시아닌 색소가 활약하면서 잎이 붉게 물든다. 높아진 가을 햇살이 안토시아닌을 색소가 밖으로 드러나면서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나뭇잎을 물들인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한 덩치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가로수와 정원수로 흔히 볼 수 있는 느티나무는 잎이 타원형으로 작고 두꺼우며, 가을에는 노란빛으로 변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카로틴과 크산토필 색소 덕분에 느티나무는 차분하면서도 깊은 가을 색을 띤다.
군데군데 보이는 팽나무의 넓게 퍼진 나무의 자태가 인상적이다. 비대칭적인 잎 모양이 특이하다. 팽나무는 가을이면 노란색으로 물들어 거리 곳곳에서 가을의 전령 역할을 한다. 나뭇잎 속의 카로틴과 크산토필이 가을 거리를 따뜻한 황금빛으로 장식한다. 덕분에 아파트 화단은 황금빛 가을로 물들었다.
대왕참나무는 그 이름에 걸맞게 다 자라면 우람한 자태를 뽐낸다. 손가락 모양으로 깊게 갈라진 나뭇잎은 사뭇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가을이 되면 붉은색과 적갈색, 주황색으로 화려하게 변해 늦가을까지 깊이 있는 단풍의 멋을 자랑한다. 안토시아닌과 카로틴, 크산토필이 대왕참나무 잎을 가을 단풍 중에서도 빠지지 않는 화려한 모양새를 뽐내도록 해준다.
이 밖에도 아파트 단지 곳곳엔 가을에 한창인 나무들이 보인다. 황금빛 단풍을 뽐내는 모감주나무, 진 붉은 산사나무의 잎들, 봄에 하얀 꽃을 피우다가 가을이면 노랗게 변색하는 이팝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단풍색이 화려하진 않지만, 타원형의 두꺼운 잎을 자랑하는 목련 역시 독특한 존재감을 발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을의 노란색은 은행나무 잎이 으뜸이다.
가을이 오면 나무들은 자신만의 색소로 형형색색의 단풍을 만들어낸다. 자연은 마치 팔레트 위의 물감처럼 엽록소, 카로틴, 크산토필, 안토시아닌 등의 색소를 조화시켜 다채로운 가을 풍경을 선사한다. 붉고 노란 잎들은 가을의 절정을 알려주는 자연의 그림이자 예술품이다.
이렇듯 오늘은 가을이 절정에 다다랐다. 문밖에 나서면 온 세상이 아름다운 색채 가득한 캔버스가 되어 나를 반긴다. 이런 가을날 오후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