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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Nov 11. 2019

핑크홀릭 조카딸, 핑크란 색을 없애버리고 싶어.

"너 돈 많이 벌어야겠다", 처남에게 말했다.

딸 대신 가슴에 품은 조카. 싫은데 자꾸 다른 옷을 입어보라는 고모와 고모부에게 화가 단단히 났다. 아랫입술이 윗입술보다 더 튀어나왔다. 정말 기분이 나쁜 게다. 연신 아내나 내가 "예쁘다"라면서 골라 드는 것마다 툭 튀어낸 입술 위로 두 눈을 내려깐다. 애써 조카딸의 의사를 무시하려고 우리가 한술 더 떠 "예쁘다, 입어 봐"라고 할라치면, 조카딸이 울상을 크게 지으며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흔든다.


싫어? 이게 더 예뻐, 공주 같아,
이제 핑크는 그만 입자.



"으으으응", 이상한 컬러의 이상한 옷 앞에서 쇳소리를 길게 낸다. 목이 부러져도 좋으니 핑크색 옷을 고수할 테야, 라는 조카딸의 집념이 느껴진다. 오늘 아울렛 매장에서만 대여섯 번째이다. 자신이 공주라고 여기는 조카딸은 긴 머리와 야들야들한 치맛자락을 사랑한다. 신발에는 꽃장식이나 매듭 장식이 '공주표' 브랜드라고 확실히 드러나야만 좋아라 손에 쥔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우리 부부가 보기에 가장 공주다운 옷, 그러면서도 세련된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스케일 다운시켜 럭셔리 핏이 빛나는 옷에 조카딸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한번 사 줄 때 가장 탐내 할 옷을 사 주고 싶은데, 조카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옷은 핑크색 파카였다. 정말 탐탁지 않았다.


 

저건 후줄근하잖아. 저거 말고 고모부가 사줄 땐 좋은 거 사.



  

미녀와 야수의 애니메이션 무도회에서 볼 법한 '공주 공주 공주'라고 추임새를 장식으로 한 것 같은 드레스에 나는 꽂혔고, 아내는 니트 원피스와 그에 곁들일 샤넬 풍 상의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서로가 고른 옷들을 몇 번 살핀 후, 우리 부부는 둘 다 여지없이 드레스처럼 입을 한 벌과 그 위에 걸칠 럭셔리한 디자인의 탑을 조카 신상으로 합의했다. 물론 조카딸은 여전히 핑크색 파카 앞에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어머~ 우리 OO이 이거 입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공주님 될 거야."


"난 원래 제일 예쁜 공주님이야."



   조카딸의 취향이 참 독특하다 혀를 차면서도 고집스러운 집착이 너무나 귀여웠다. 어이없는 웃음이 계속해 입가를 머물게 만든다. 정말 어지간해서는 조카딸이 좋다는 핑크색 파카를 사주고 싶지만, 정말 그건 흔하디 흔한 겨울 파카일 뿐인데. 고모와 고모부를 그 작은 뇌 속에 계속해서 각인시키려는 우리 부부의 욕심에는 가당치도 않은 선택이었다.


결국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세상의 온갖 고뇌를 드러내는 조카 앞에서 하는 수 없이 허접한 그냥 파카, 그것도 핑크색을 샀다. 입고 온 파카를 벗어던지고 새로 산 핑크색 고운 털이 달린 파카를 바꿔 있었다. 그제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리고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허리를 숙인다. 앙증맞은 조카다.


고모, 고모부,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전까지 탐탁지 않은 이상한 색깔, 웜톤 여름 컬러의 핑크색 파카를 아주 강하게 주저하던 아쉬움이 사라지고, 이상한 핑크색을 입고 좋아하는 조카딸의 애교만이 눈에 들어온다. 이상한 핑크색의 허접스런 파카를 입어도 예쁜 조카딸은 그대로다. 아니 옷을 새로 입으니 더 예쁘다. 이번에 고모부가 포기 하마.



그래, 다음에 샬라라 하는 공주 옷으로 사줄게.






이십 년 이상 워크홀릭으로 살았고, 그 이전에는 스코어홀릭으로 살았다. 객관적으로 표현해서 '-홀릭'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집착증이었고 긍정적으로 보면 마니아라고 부를 만했다.


이제는 '홀릭'하지 않고 살자라고 다짐해 왔는데, 조카딸이 '홀릭'을 떠오르게 한다.


핑크홀릭, 핑크 마니아, 핑크 집착?



어떻게 핑크색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지경일까? 딸 없는 내 입장에서 조카딸의 오늘 유난 맞은 핑크 사랑을 직접 지켜보고도 신기했다. 핑크홀릭이라는 단어가 있나? 스마트폰에서 찾아보니 이미 있더라. 정말 핑크라는 여성성 강한 컬러를 이제 5살인 조카까지 푹 빠졌구나, 라는 생각에 참 환경이란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OO이는 웜톤 봄 컬러 핑크가 잘 어울리는데..."



앞서 방방 뛰는 조카딸의 핑크를 보면서 아내가 계속해 아쉬워한다. 안 어울리는데, 안 어울리는데, 아내의 말을 따라 내 귓가가 수백 번 같은 소리에 진동되더니 핑크를 볼 때마다 "안 어울려"라는 주홍글씨가 핑크색을 더 얄밉게 만들었다.


운동화 샵에 들러 150밀리미터 사이즈 정도의 스니커즈를 보고서 다들 귀엽다고 난리였다. 그제야 나는 오늘 아울렛에 온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OO 큰 조카딸이 아니라, 동생인 작은 조카딸 생일 선물을 사러 온 건데, 정작 큰 조카딸이 횡재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애초부터 그럴 의도였지만. 여시 같은 큰 조카딸에게는 뭘 사줘도 아깝지 않다.


생일 맞은 작은 조카딸은 공주가 아니라 선머슴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아내의 곁에 절대 오지 않는다. 손가락이라도 마주 치면 기겁을 하고 경기를 튼다.


작은 조카딸에게는 하얀 털이 외부를 장식하는 스니커즈를 생일 선물로 샀다. 140밀리미터 사이즈의 스니커즈가 큰 조카딸의 그만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장군 같은 작은 조카딸


하얀 스니커즈와 핑크 파카를 품에 안고 돌아간 큰 조카딸이 궁금해 "OO이는 좋아한대?"라고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카카오톡으로 처남과 잠시 문자를 주고받더니 "엄청 좋아하는데, OO이보다 막내가 더 좋아한대.", 하얀 신발을 품에 안고 절대 놓지 않는다고 한다. 손에서 떼 낼 방법은 자기 발에 신기는 때 뿐이라고 한다.


내 동생 딸들 아니라고 할까 봐.
어떻게 신발이랑 옷을 그렇게 좋아해?




작은 조카딸은 언니에게 늘 물려 입는 처지다 보니 그런가, 갑자기 미안한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처럼 살면 안 되는데, 라는 측은한 마음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얘 이러다 신상홀릭 되는 거 아냐?



"아마도 그럴 거야", 아내의 자지러지는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작은 조카딸도 좀 챙겨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 두 딸을 한 팔씩 위에 올린 처남의 무거운 어깨가 떠올랐다. 나야 나 좋아라고 하는 거지만, 처남은 두 딸 건사하기 힘들겠구나, 싶다. 


처남, 힘들겠어. 어떡해, 워커홀릭으로 살아서 돈 많이 벌어야지.



안쓰런 측은지심보다 두 딸을 가진 아빠에 대한 시기심이 질투를 자아낸다. 핑크홀릭 큰 조카, 신상홀릭 작은 조카. 그 사이에서 고생할 워커홀릭. 그리고 그 셋을 예쁘다고 바라볼 나와 아내. 지금처럼 계속 예쁘게 살아라, 처남댁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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