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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May 14. 2023

오지라퍼

이윤수 르포집

나는 잔소리 듣기를 엄청 싫어한다.

잔소리 듣기가 고된 일하기보다 더 싫어서 직장에서도 시킴을 받기 전에 일을 먼저 찾아서 완벽하게 하고 공동 과제도 내가 도맡아서 한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나는 피곤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묵묵히 일 잘하는 사람이란 평을 받는 부작용이 생겼다.

잔소리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마는 내 이 타고 난 잔소리 기피 증세는 내 어린 시절 추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다. 그것은 잔소리 기피증인 나를 낳으신 엄마가 불행히도 자신은 정작 잔소리의 달인이시기 때문이었다.

늘 자애롭고 자상하신 나의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너무나 아끼신 나머지 틈만 나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간섭하는 것을 낙으로 삼으시는 통에 항우와 유방처럼 환상적인 숙적 조합을 이룬 우리 두 사람의 잔소리 전쟁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투는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강력한 엄마의 힘 앞에서 불쌍한 포로신세인 나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항을 멈추고 무조건 항복을 한 적은 없다. 비록 가출 등의 극단적 선택을 할 배포는 없었지만

"이 반찬 맛있으니 먹어봐라!"

고 하면 그 반찬은 더 안 먹고

"밥 더 먹어라"

하면 숟가락 놓고

"일찍 들어와라"

하면 더 늦게 들어가는 등으로

'엄마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오히려 역효과만 나요. 난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냈지만 그 절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가서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사실 그랬다. 지금 독자들은 '이런 철없는 놈!'이라며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내가 사실 그렇게 못된 놈은 아니었다. 비록 잔소리를 듣는 것은 병적으로 싫어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좋게 말해서 독립심이 강한) 나는 공부도 꽤 잘했으며 나가서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부리지도 않았다.

내 생각에는 나는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아이였다. 그리고 잔소리 듣기만을 싫어하면 불공정하니까 칭찬 듣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간혹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타 오거나 학교에서 우등상 개근상을 타오면 나는 그것을 전시하기는커녕 다락에 몰래 감추어버렸다. 그걸 보면서 또 사람들이 나를 이러쿵저러쿵 입방아에 올리는 것이 싫었다.

나의 이 처절한 잔소리 전쟁의 전기는 나의 대학 진학이었다. 내가 엄마의 잔소리 감옥에서 탈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멀리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이었기에 나는 오로지 잔소리 탈출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가 아니라 하려고 노력만 했다. 실제로는 진학공부는 안 하고 재미있는 문학 책만 읽었다.)

아무튼 나의 이런 불경스러운 언동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썩지 않은 동아줄이 내려왔고 나는 서울의 대학에 진학을 하여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탈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음은 청운의 꿈을 품은 나의 기차가 한강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판명이 되었다.

엄마의 잔소리 바통을 이어받은 나의 누나가 서울역에서, 그것도 심지어 든든한 지원군인 매형까지 대동한 채 나를 생포하려고 서울역 개찰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갓 신혼의 단 맛에 취해 있던 매형은 누나의 그 잔소리 유전자를 무슨 사랑의 속삭임으로 착각하고 자신에게도 곧 닥쳐 올 그 재앙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나의 적군의 편에 가담해 있었다.

그리하여 4년간의 기나긴 포로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매형은 곧 정신을 차려서 내 편으로 합류했지만 그는 아무런 힘이 없었고 오히려 나와 같은 잔소리 감옥의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나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석방이 되었지만 그는 종신 무기수 신세가 되어 내가 빠진 자리에 쏟아지는 누나의 잔소리 십자포화를 두 배로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의 날이 왔다.

군대를 갔다 오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아내에게 한 제1호이자 유일한 명령은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시오. 나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였다.

그랬다. 현명한 독자들께서는 또 '이런 철없는...'이라고 혀를 차고 있겠지만

그때까지는 내 명령이 통했다.

세상 토끼처럼 착하고 온순한 아내는 나의 성실함에 반하여 나의 그 무례한 도발을 용인했다. 어쩌면 찬밥 더운밥 진밥 고두밥 가리지 않고 짜나 싱거우나 매우나 다나 투정하지 않고 고정메뉴 순환식단인지 어제 나왔던 반찬이 다시 나왔는지도 모르고 주는 대로 그릇 바닥까지 싹싹 먹어대며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는 나를 아주 쉬운 상대라고 생각하고 내심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이 잔소리 전쟁에서의 짧은 승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나는 글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것을 발표하기는 싫어한다. 누가 내 글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내 글은 나의 어린 시절 불운한 상장처럼 태어나자마자 어두운 다락방에 내던져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여봉, 자기 글이 내가 보기엔 좋은 것 같은 데 그냥 썩히기에는 아깝지 않아? 한 번 발표를 해 보는 게 어때?'라는 아내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서 몇 달 전부터 내 글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여봉, 자기 글이 깊이는 있는 데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쓰면 어떨까?'

하는 통에 나는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다.

나는 어느새 내 마눌님의 잔소리 심리전에 넘어간 포로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니야. 나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쓰는 거야. 나는 가벼운 글은 쓰고 싶지 않아. 인기를 추구하기보다는 내용이 있는 작품을 쓰고 싶어."

"아이 그래도 아무도 안 읽어주면 무슨 소용이야. 응? 자기 능력 있잖아!"

그래서 나는 내가 깃털처럼 편안한 글을 쓸 능력도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또 재미가 없어지려고 한다. 큰 일이다.

정작 오늘 내가 쓰려고 했던 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오늘 이야기는 국제 잔소리꾼 오지라퍼 이야기다.

나는 캐나다에 올 때 그동안 한국에서 마눌님에게 당한 무참한 패배를 만회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쿡이나 캐나다는 개인주의이고 사생활을 존중하는 사회문화이니까 한국에서 처럼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간섭을 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 더 이상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라고 엄청난 기대를 하며 Vancouver 공항에 내렸다.

착각이었다.

아, 차라리 한국에서는 최소한 낯선 사람들에게는 잔소리를 하지 않는데, 여기서는 간섭과 잔소리가 남녀노소 상하귀천 친소여부를 가리지 않고 불시에 쏟아져 들어온다. 좋게 말하면 친절이요 배려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모두 간섭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가는 길을 물어본 것이 나의 첫 번 째 실수였다. 너무나 친절하신 여기 사람들은 누군가를 도와주고 'Thank you!'라는 말을 듣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자 보람인 것 같다.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지신 그 백인 할머니는 난생처음 본 내가 무슨 이역 땅에서 온 조카라도 되는 것처럼 자세하게 길을 설명해 주다가 나중에는 아예 나를 이끌고 출구까지 데려다주고 선 자기가 가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 후 나는 이 분들의 그 과다한 오지랖에 익숙해질 때까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내가 그 노력의 절반 만이라도 나의 엄마와 누나와 아내에게 했더라면 아마 나는 한국 최고의 아들 동생 남편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멀리서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마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한국에서처럼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가면 '무례한 놈, 이상한 놈'이라는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어쩌다 한 번이라도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불러주면서 '오늘 날씨가 좋지요?... 어쩌고 저쩌고..' 세상 행복한 사람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또한 '스칼렛 요한슨' 빰치도록 예쁘게 생긴 늘씬한 젊은 여자가 눈웃음을 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더라도 '혹시 나에게 호감이 있나?'라고 오해하면 절대로 아니 아니 아니 되오!

아무튼 나는 오늘도 우리 집 강아지님을 자전거에 태워서 산책을 하다가 친절하신 옆 집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우리 강아지가 어릴 때에는 걸어서 산책을 했는데 나이가 조금 먹더니 이제 게을러져서 길을 가다가 주저앉아서 걷기를 거부하기 일쑤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전거에 바구니를 매달아서 태우고 다닌다. 요렇게!

효과는 좋았다. 나도 개도 만족스럽게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쁘다고 한 마디씩 하는 것은 좀 귀찮지만...

그러나 오늘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산책 나가세요? 즐겁게 하세요. 그런데 바구니가 개 크기에 비해서 좀 작은 것 같네요. 개가 힘들겠어요. 혹시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지는 않나요? 제가 더 큰 바구니를 살 수 있는 곳을 알려드릴까요? 개도 성격이 있기 때문에 주저리주저리..."

너어어어무 친절하시게 말씀을 하시고는 가신다.

나의 마음에도 없는 "Thank you for your kind advice."에

"You are welcome!"이라고 만족스럽게 답을 하시고 가 버리신다. 요렇게

 또 이 분은 내가 개와 함께 요렇게 보트를 타고 오는 것을 보면

"아휴 날이 덥지요? 그런데 개 구명조끼는 입히셨어요? 개도 물에 빠지면 물살이 빨라서 위험해요. 개 구명조끼 파는 곳을 알려드릴까요? 우리 개는 펫스마트에서 샀는데 그게 좀 비싸도 월마트 것보다 품질이 훨씬 좋아요. 주저리주저리..."


아, 이국 땅에서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나의 잔소리 전쟁이여.

엄마와 누나의 잔소리가 그립다.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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