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수 May 14. 2023

마눌님이 달라졌어요

요즘 캐나다도 물가가 장난이 아니다.

코로나가 끝나서 살기가 좀 좋아지려나 했더니 호환마마 아니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인플레이션 귀신이 여기 저기 마구마구 몰려와서 내 월급 빼고 모든 것이 다 올라버렸다. 정말 엄살이 아니라 내가 종사하고 있는 여행업은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서 거의 3년을 숨만 쉬며 버텼는데 씨이불 내 일급은 코로나 이전과 똑같이 $250이다. BC 주 최저시급도 $15.65에서 $ 16.75로 올랐는데 왜 내 일급은 시베리아 동태도 아니고 몇 년째 동결 중인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한국에서 석유가 펑펑 나와서 돈이 남아도는 고국분들이 엄청나게 관광을 오시면 좀 올려주려나?

암튼 식료품 값이 많이 올라서 올 초에 20%가 올랐다고 하는데 실제로 장을 보러 가면 10개 들이 조그마한 사과 한 봉지에 $5 하던 것이 지금은 $9가 넘는다.

처음에 이민 와서 친구도 하나 없고 낯설고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매일 같이 '창 밖에 주룩주룩 내리는 겨울 비만 바라보다가 우울증 걸리겠다'라고 불평하는 아내에게

"그래도 여기 과일과 식료품은 싸고 다양하잖아!"라고 큰소리치고 구슬렸는데

이래가지고서야 '마눌님이 좋아하는 체리, 망고, 오렌지, 블루베리를 배 터지게 먹여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여기는 끝없이 너른 들판에 풀어놓아 기르는 소가 사람 수 보다도 더 많다는 목축 강국이라 고기 값이 싸서 다행인데

무게 대비 과일이나 채소보다 싼 이 소고기 값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늘도 장을 보러 왔다가 가장 만만한 소고기를 먼저 골라서 장 바구니에 담고 청과코너로 갔더니 상추 값이 허걱 한 단에 $4.99다. 어쩌면 이럴 수 있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게 주인아주머니를 째려보았더니 지레 겁을 먹으셨는지 뭐

'캘리포니아에 가뭄이 들어서 병충해가 어쩌고... 그나마 물량을 확보하기도 힘들었다고...'

하긴 주인아주머니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만

'아 이래서 상추를 고기에 싸 먹는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일편단심 좋아하던 상추를 못 본 척 외면하고 좀 싼 멕시코산 배추를 선택하는 외도를 하게 되었다.

그놈의 돈이 원수다. 미안하다. 돈 앞에서는 지조도 절개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내 이 알량한 인심을 탓하거라.

그리하여 캐나다에 와서 좋던 낙이 하나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맛있게 저녁을 해 먹을 요량으로 귀하신 배추님을 품에 안고 의기양양 집으로 와서 배추를 물에 씻다가

"여보, 배추 속은 보니까 깨끗하고 겉잎으로 싸여있으니 그냥 안 씻으면 어떨까?"

하고 옆에서 양념장을 만들고 있는 마눌님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0.00001초도 망설임 없이

"그냥 흐르는 물에 씻으세요!"

라고 대답을 한다.

이럴 수가!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우리 마눌님이 달라졌다.

어제도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혼자 씩씩 거리길래 내가 그동안 터득한 눈치 밥으로 센스 있게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라고 물어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 글쎄 우리 회사 장 차장 있잖아! 지가 기술자면 다야? 응, 지가 하는 거 나도 다 할 수 있거든... 근데 무슨 유세를 부리는지 작업지시도 안 따르고 지 멋대로 하고...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혼내주었지 어떡해? 지랑 부딪치고 지 때문에 고생하는 직원들이 어디 하나 둘이래야 말이지."

"그러니 잘못했다고는 해? 자존심 엄청 세다며?"

"그럼 누가 봐도 지가 명백히 잘못했는데... 나중엔 사과하더라! 그래도 앞으로는 뭐 선은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나?... 흥, 내가 언제 선을 넘은 적이 있어? 내가 항상 오냐오냐 참아주니까 지가 깐죽깐죽 선을 넘어왔지!"

란다.

아, 마눌님이 변했다. 내가 되지도 않게 똥고집 부리고 소리를 질러도 무슨 예수님 설교라도 듣는 듯 받들어 모시던 예전의 그 토끼같이 여리고 양처럼 순하던 아내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대차고 자신 있는 어벤저스 님이 강림을 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마눌님만 그런 게 아니다. 여기는 동물들도 겁대가리가 없다. 지들이 세상의 주인인 줄 알고 사람들을 우습게 본다. 좋게 말하면 친하고…

그리고 잘못을 한 것도 없이 괜스레 내가 혼이 난 것 같은 느낌 같은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탓일까? 나는 찍소리 못하고 마눌님이 시키는 대로 배추를 마지막 속 한 잎까지 정성껏 '흐르는' 물에 빡빡 씻어서 물기를 제거한 후 쟁반에 담아서 식탁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여기서는 나만 빼고 다들 모두 당당하다.

뿐만 아니라 이민 초기에 외로워서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던 마눌님은 이제 그 특유의 친화력으로 동네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서 휴일에도 엄청 바쁘다. 영어는 나보다 훨씬 짧아서 겨우 마트에서 장을 볼 수준인데도 한국 친구도 있고 캐나다 친구도 있고 수영장에 가면 중국인 친구까지 있다. 어떻게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지 정말 불가사의다. (아, 우리 마눌님, 불가능이 없는 초능력 어밴저스였지 참!)

이제는 드디어 아이들에 대한 영유권까지 주장한다. 전에는 아이들이 뭘 잘못하면

'모두 내 탓이요. 제 죄이올시다.'라고 하더니

이제는 아이들이 좀 잘하면

'모두 내 덕분이요. 내가 초등학교 전교 1등이었소.'라고 큰소리친다.

(마눌님이 나온 노곡 초등학교 정원 46명, 한 학년에 평균 7.6666 명! 아, 사람은 소수점이 없나? 그래 8명 중 1등이라고 해주자!)

어쨌든 사회성이 부족하고 성깔과 자존심으로 뭉쳐진 나는 친구도 잘 못 사귀고 고국의 친구들은 어쩌다 보니 연락이 하나하나 소원해져서 고립무원이 되어간다. 내 편은 점점 줄고 마눌님 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세상아 덤벼라'라고 자신만만하고 무모할 정도로 겁이 없던 한국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하는 수 없다.

대한독립만세는 더 이상 부르지 말고 대항을 포기하고 강력한 어벤저스 편에 붙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싸랑해요 마눌님! 저도 좀 이뻐해 주세용!

이전 01화 오지라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