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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부자 Jan 06. 2025

회복의 기다림, 무거운 발걸음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아직 힘들지만 잘 버티고 있어요."

어제 저녁,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과 한잔의 술이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었던 걸까. 아니면 아내의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다준 것일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젯밤은 꽤 오랜만에 제대로 잠을 잤다. 평소처럼 뒤척이지 않고, 아침에 눈을 뜨자 머리가 조금은 맑았다.


"그래, 충분히 잔 것 같아." 스스로 그렇게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며, 언제나처럼 기도를 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감사합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오늘은 어제보다 더 밝고 회복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도의 문구는 변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딘가 더 차분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그녀가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얻은 희망이 내 마음을 덮어주고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며 나는 또다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오늘도 믿음을 잃지 말자. 그녀를 위해 조금 더 힘내자."


며칠 동안 병원에 차로 다녔지만, 주차 문제와 교통 체증이 너무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은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조금 더 여유로울 거라 기대했지만, 이동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보니 생각보다 빡빡했다. 장남이 내일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인천으로 올라가는 날이라, 그를 배웅하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지하철은 차량 이동에 비해 10분 정도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병원까지 걷는 시간과 지하철 대기 시간을 더하니 예상보다 타이트했다. 지하철의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편리하기도 했지만, 내일은 시간을 더 여유 있게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서둘러 준비하면 오늘보다 덜 조급한 마음으로 병원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짧은 시간 안에서도 나는 내 일상을 조금씩 조정하며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을 매일 다듬어가고 있었다.


중환자실 로비에서 기다리며 다시 기도를 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마리아님, 예수님, 하느님, 

어제보다 더 밝고 회복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며칠 동안은 면회 시간이 되기 17분만 되어도 담당자가 입장을 허락해 주었는데, 오늘은 20분이 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단지 3분의 차이였지만, 하루 종일 이 시간을 기다려 온 나로서는 그 3분이 유난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다.


마음속에서는 한마디 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지만, 애써 이를 꾹 참았다. 괜스레 내 감정이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을 어지럽히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는 시계를 힐끔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19분쯤 담당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짧은 1분의 여유가 그렇게도 반갑고 다행스러울 줄은 몰랐다. 나는 가벼운 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오늘도 맨 처음 면회실로 들어갔고 저 멀리 눈을 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 "자나?" 하고 묻자, 

곧바로 눈을 뜨며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약했지만, 그녀답게 짧고도 분명했다.


그녀는 첫마디로 말했다. 

"자기야, 나 이거 너무 힘들어." 


그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힘들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는 데 정답이 필요할 리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말했다. 

"좀만 참아. 곧 괜찮아질 거야."


막둥이가 들어오자 그녀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드리워진 피로와 고통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아이를 보며 웃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대견하고 안쓰러웠다. 그녀는 힘든 와중에도 아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자신이 여전히 그들의 엄마임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정신은 여전히 혼미한 상태였지만, 그녀의 눈빛과 말투에는 스스로를 되찾으려는 의지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그 노력은 흐트러진 마음과 혼란스러운 상태 속에서도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 마음 한편에 작고 따스한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비록 힘들고 고된 과정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큰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제주도에 있다고 믿었다. 딸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병원에 왜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얇은 경계에 서 있는 듯했다. 기억의 실타래가 어지럽게 엉켜 있었고, 조금씩 현재를 인식해가면서 느끼는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가 화를 낼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과 불편한 몸이 그녀를 얼마나 답답하게 만들까.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의외로 담담했다.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당신 많이 아팠어. 죽을 뻔했어."


그 말을 듣던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해!"


그녀의 말에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그녀의 농담 속에는 고된 시간들을 애써 이겨내고 있는 그녀만의 방식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입으로도, 속으로도 답했다.

"알았어, 내가 잘할게."


그 순간, 그녀와의 약속이 나를 더 단단하게 잡아주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위해 더 잘해야 할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며, 마음속 깊이 다짐을 새겼다.


아내는 계속해서 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회사에 갔어."라고 말하니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딸이 회사를 다닌다고? 정말이야?"


그 반응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는 아직 딸이 어리게 남아 있는 걸까. 

나는 그녀에게 뇌출혈로 쓰러졌고, 그로 인해 응급 수술을 받았다고 천천히 설명했다. 


그녀는 내 말을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많이 아팠구나. 근데 난 지금은 안 아픈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안도와 애틋함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투와 표정 속에는 자신의 상태를 서서히 받아들이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생각하고, 푹 쉬자. 지금은 쉬는 게 제일 중요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그 모습에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가 안정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작지만 분명한 회복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조금 더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조용히 곁에 앉아 있었다.


장남이 막내와 교대하여 병실로 들어오자, 그녀는 아들을 반갑게 맞았다. 환한 미소와 함께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이 어제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어제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언제 제대하냐?", "어떻게 나왔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문득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난 아이들 정말 잘 키운 것 같아. 뿌듯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찼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 애들 정말 잘 키웠어."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입술을 오므려 내게 뽀뽀를 해주었다. 그 작고 짧은 행위 속에는 너무도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과 감사,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견뎌온 그녀의 모든 노력이 그 안에 스며 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다시 다짐했다. "그녀가 이 모든 시간을 이겨내고, 우리 곁으로 완전히 돌아올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하자." 그녀의 따뜻한 뽀뽀는 그 다짐에 새 힘을 더해주었다.


의사와의 면담에서, 내일 그녀의 머리에 삽입된 관을 빼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관을 제거한 후 뇌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 더 이상 관이 필요하지 않지만, 만약 뇌압이 다시 높아질 경우 척추를 이용한 시술이나 재삽입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 과정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오늘 의사의 태도는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어제 만난 의사는 부드럽고 긍정적인 말투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의 설명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의사는 단호하고 퉁명스러웠다. 차가운 말투와 딱딱한 어조는 어제와 같은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말투의 온도 차이가 내 마음속 불안을 두 배로 키웠다. 같은 사실이라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나는 의사의 단호한 말 속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의 냉정한 태도는 쉽사리 희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병실로 돌아오는 길,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제의 따스한 설명과 오늘의 냉정한 설명은 결국 같은 내용일 뿐이라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마음속 기도가 자연스레 이어졌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내일의 과정을 잘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내는 여전히 간호사들의 고생을 걱정하며 마음을 쓰고 있었다. 

내가 "뭘 사다 드려도 안 받으실걸."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단호하게 "다 받을 거야. 그래도 고생하시잖아."라며 나를 타박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간호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하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제주도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슬며시 말했다. 

"우리 제주도 여행 다녀온 지 벌써 3주가 지났는데도 계속 얘기하는 거 보면, 좋은 기억으로 남았나 봐." 


그러다 문득 궁금해져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누구랑 다녀왔는지 기억나?"


그녀는 곧바로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지금 나한테 문제 내는 거야?" 


그녀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의 그녀는 정말로 다 나은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몸은 힘들고 정신은 혼미한 상태지만, 예전의 생기 넘치는 그녀가 그 대답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안이었다. 그녀의 건강했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서 커져 갔다.


그녀는 나를 보며 "뭐래?"라고 말했다. 

의사와의 대화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힘이 없었지만, 스스로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 머리에 심은 관을 내일 빼야 한대. 그런데 너무 움직이거나 발버둥치면 안 된다고 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아~ 그래? 알았어." 그리고는 곧 덧붙였다. "그럼 가. 나 쉴게."


피곤하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툭 내뱉었다. 

"아니, 쉬어야 한다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말투에는 어딘가 특유의 장난스러움과 익숙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그녀의 강한 의지와 여전히 살아 있는 그녀다운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 몸은 힘들고 지쳤을지 몰라도, 그녀는 그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어제 사다 준 수면 안대를 언급하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걸 사다 줬어? 그럼 그거 해주고 가!" 


간호사를 불러 안대를 가져와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자신의 필요를 이렇게 명확히 표현하는 모습을 보니, 예전의 생기 있는 그녀가 조금씩 돌아오는 듯한 희망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금세 흘렀고, 면회 종료 시간이 다가왔다. 담당자는 칼같이 면회 종료를 알렸다. 그 말에 나는 아쉬움을 가득 안고 병실을 나섰다.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가 완전히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몸은 조금씩 회복 중이지만, 그녀가 느끼는 답답함과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하루빨리 일반실로 옮겨,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지금의 이 짧고 제한된 면회 시간이 답답하고 아쉬웠다. 나는 병원 문을 나서며 조용히 기도했다. 그녀가 더 나아져서 일반실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휴가를 내서 나온 아들과 점심을 먹고 동대구역까지 바래다주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더 의젓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건강하고, 엄마 걱정 너무 하지 말고 잘 지내."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내라는 말 대신 눈으로 답했다. 그 순간, 내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준 아이들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느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의사의 말처럼 관을 제거하고 일반실로 옮길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답답한 기분이 가슴에 가득 찼다.


그녀의 불편한 몸짓, 어렴풋이 자신을 알아가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불편함을 호소하면서도 무언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럽고 또 애달팠다.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다독이려 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더 힘들고 긴 시간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짙어졌다.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혼란과 불편함 속에서 방향을 잡으려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답답함도, 그녀의 혼란도 결국 회복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이 과정을 끝까지 걸어갈 힘을 잃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집에 돌아오니 딸이 퇴근하며 가져온 배 한 상자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딸의 작은 배려가 집 안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았다. 딸과 함께 잠시 동네를 걷기로 했다. 차가운 저녁 공기가 몸을 스칠 때마다 그녀와 함께 걸었던 기억들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걷던 중 딸이 문득 말했다. 

"여기 엄마랑 벚꽃 필 때 왔었잖아요." 


그 한마디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함께 손을 잡고 벚꽃 아래를 걸었던 날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 순간, 길 위의 시간과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길을 걸었다. 마음속에서는 믿음의 늑대와 두려움의 늑대가 여전히 다투고 있었다. 믿음의 늑대는 그녀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했지만, 두려움의 늑대는 회복의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을 내세우며 으르렁거렸다.


딸과 함께 걸으며 그저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이 길 위에서 그녀와 함께 다시 벚꽃이 만개한 풍경을 걸을 날을 기다리며, 믿음의 늑대에게 조금 더 큰 먹이를 주기로 했다.


이마트에 들러 간단히 명절 준비를 하며 아내가 일반실로 옮길 때 필요할 물품들도 함께 샀다. 물건을 하나하나 고르며 그녀가 조금 더 편안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마치 작은 준비 하나하나가 그녀의 회복을 돕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니 몇몇 사람들에게서 걱정 섞인 전화가 걸려왔다. 그들에게 아내의 상태를 설명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아직 힘들지만 잘 버티고 있어요." 말은 비슷했지만, 그들의 걱정과 응원이 아내의 빠른 회복에 큰 힘이 될 거라 믿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묘하게 마음이 무거워졌다.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이 꿈틀거렸다.


결국 답답함을 달래고자 맥주를 몇 캔 꺼내 들었다. "술 한 잔이면 마음이 좀 안정될지도 몰라."라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며, 천천히 맥주를 마셨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어딘가에서 눌려 있던 감정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그렇게 4캔을 비우고 나서야 몸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잠자리에 들며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신이여, 우주여, 영혼들이여 감사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밝고 회복된 모습으로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기도를 끝으로, 나는 그녀와 내일의 만남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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