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폐를 가지고 있는 르네와 그의 친구 마르쿠스. 둘은 함께 카누를 탔고, 마르쿠스는 르네를 특이하지만 일반적인 방식으로 대한다. 자폐를 가지고 있는 르네를 '타자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긴다. 르네가 카누를 타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먼저 묻기도 하고, 그의 대답이 없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젓기 기술을 보여준다. 르네가 가고 싶어하는 화장실을 데려다 주기도 하고, 자신의 힐링 공간인 동굴에 데려가기도 한다. 르네 입장에서 한 번, 자신의 입장에서 한 번 계속 주고 받으며 카누를 탄다. (마르쿠스는 이미, 소통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 한 번씩 이야기를 하는 것 말이다)
그러다가 르네가 동굴 속에서 충격을 받고 예민해진 나머지, 엎어진 카누 속으로 몸을 숨기고 들어간다. 마르쿠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만히 르네가 안정될 때 까지 기다린다. 그러다가 문득, 르네도 마르쿠스도 똑같이 느꼈던, '풀을 손으로 느꼈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르네에게 풀을 하나 건넨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타인에게 표현하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상태'가 있다. 무의식 속에 있어 언어화 하지 못했기에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영화 속 에는 두 명이 등장하지만, 실제 우리네 마음 속에는 저 둘이 하나가 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언어로 소통하지 못하는 '나' 와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나' 말이다. 그 둘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좋은 상황이 될까.
좋은 상황이란 무엇일까? 지금 현실을 온전히 느끼고 경험하여 즐기는 것, 혹은 원하는 방향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 들이 되겠다. 무엇보다 내 안의 르네와 마르쿠스 모두가 원하는 것들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표현하고, 둘 모두가 좋아하고 만족하는 순간을 만나는 것이 '좋은 상황' 이 되겠다.
내 마음의 르네와 마르쿠스가 동시에 즐거워 할 수 있는, '풀을 손으로 느꼈던 순간' 은 나에게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이 같은 경험을 갖는 순간, 아마 노력을 했고, 그 노력에 대한 보상도 나에게 찾아 온 순간이 그럴 것이다. 노력과 보상, 크고 거대한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하러 나간 공원에서 귀여운 고양이를 만나는 것, 끝내야 하는 일을 마무리 짓고 나오는 길에 멋진 달을 발견하는 것, 필요한 공부를 위해 강의를 듣는데 그 강의의 선생님이 찾아와 고생하는 중이라며 덕담을 해주는 것들 말이다.
오늘도 나의 르네와 마르쿠스를 떠올려 본다. 내 마음 속 르네가 좋아하는 것과 마르쿠스가 좋아하는 것 들을 잊지 말고 한 가지씩 해야 겠다. 그리고 그 둘이 동시에 즐거워 하는 순간을 자꾸 찾아나서야겠다. 아주 디테일하게 내 삶을 관찰하여,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결심도 한다. 내 오른손으로 쥔 펜의 그립이 내 손가락과 꼭 맞는다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추가적으로, 위의 장면이 너무 좋았다.
한참 힘들어 길을 따라 걸을 때, 손을 뻗어 풀을 느꼈던 적이 있다. 문득 내가 '마라토너'가 된 느낌이었고, 내 옆에 있는 풀들은 결승선 앞에서 마라토너를 보며 응원하는 갤러리 같았다. 갤러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걸었다. '힘내!' 라고 외치는 많은 풀들 덕분에 힘을 얻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