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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게슬기롭다 Jan 23. 2024

성장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가짜 성장 일지 #11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을 떠올리면, 좀 짜증이 나지만 애틋하다. 자기가 밀가루를 사기 위해 현대백화점 지하 2층에 들렀다느니, 집 안에는 학부모들로부터 받은 어떤 선물들이 가득한 선반이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때 얼굴에 미동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길래, 그 이야기 속에서 아무런 감정적 변화가 없을까. 그리고 그게 정말 자기 반 애들한테 할 이야긴가.


그렇게 곱씹고 난 뒤 맨 마지막엔, 그녀가 해준 귤 이야기를 항상 떠올린다. 제주도에서 귤 선물을 하나 받았다고 했다. 그 귤 중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주황색 빛깔이 고운 귤을 하나 먹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도, 그 귤 중에서 가장 예쁜 것을, 그다음으로도 계속해서 ‘남은 것들 중 가장 예쁜 것’을 선택했다고 했다. ‘현대백화점에서 밀가루를 사는’ 사람의 이미지 정도로만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훅을 꽂았다.


얘들아, 나는 그래서 귤 한 박스를 먹는 내내 ‘가장 예쁜 귤’만 먹었어. 너희들은 어떨 것 같니. 거기서 만약 ‘가장 상한 귤’부터 먹으면, 그 박스 하나가 끝날 때까지 ‘가장 상한 귤’만 먹는 거야.


이상했다. 이런 훅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매번 우리의 입꼬리를 삐죽거리게 만드는, ‘담임 유니버스’ 속에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담임 유니버스’ 덕분에 그녀는 인생을 살면서 부정적인 것을 스스로 선택하진 않았다. 여러 개 중에 항상 좋은 것, 나에게 잘 맞는 것들을 선택했다. 고운 것을 좋아하던 그녀는 (돈도 좋아했지만) 여러 부서 중 가장 사람이 적고 트러블이 덜 발생할 것 같은 ‘전산실’을 담당했었다. 그녀의 유니버스에선, 신종플루를 앓는 고3 학생은 환자가 아니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끝마치고 집에 가야 했다. 그게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대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내게 어떤 ‘자격증’ 딴 게 없냐고 물었다. 변호사든 회계사든 멋진 플래카드를 걸 만한 자격증을 물어봤지만, 내가 입 밖으로 뱉을 수 있던 건 운전면허증뿐이었다. 그건 아름다운 선택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상한 귤’을 선택하곤 했던 나는 , ‘이거라도 안 되겠냐고’ 너스레를 떨고 돌아왔던 게, 마지막이었다.


어떤 선택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가장 맛있는 귤을 먹으려던 사람이었을까? 그게 이기적이라고 느끼던 사람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게 두고, 나는 질보다 양이 많은 선택을 하거나, 가장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것들을 나서서 선택했다. 어떤 때는 그런 선택을 하는 스스로가 양심적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대부분은 <그냥 습관화>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게 요즘, ‘정말 좋은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물 밀듯 찾아온다. 더 이상 내 주변에서 내가 ‘상한 귤 선택’을 할 때 함께 아쉬워하거나, 꽤나 ‘괜찮은 귤 옵션’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내가 상한글률 좋아하는 줄만 아는 눈치였다. 이젠 그런 데에 힘을 쏟는 건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예쁜 귤”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무언가를 산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그중에서 선택하려고 한다. 가치관을 기준 삼아 보면, 가장 높은 가치에 있는 것은 역시 ‘시간’이다. 나의 ‘지금 이 순간’ 이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고 있는, 오감을 가지고 있는 나의 감각기관, 내 몸뚱이, 그리고 나를 인식하기로 했다. 어떤 선택의 순간엔, 나의 이름을 부르며 가장 ‘예쁜 귤 선택’ 이 무엇일지, 자문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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