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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 한소 Mar 01. 2024

숨그네를 타며 헉헉거린다

삶과 죽음을 오가다

이미 지나간 겨울을 다시 소환해 불러들인 것처럼 오늘 바람은 칼날처럼 매섭고 차다. 서둘러 온 봄이 꽃샘을 데려 온 건지 겨울이 앞서 온 봄을 밀어내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고 마지막 악을 쓰는 중인지. 햇살은 여전하다. 더한 빛을 낸다. 햇살이 칼바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마음을 밝고 환히 비췄다. 그늘 어디까지 세심히 배려하듯 몸 전체를 태우며 항성의 모습을 토해내고 있다. 태양의 배려보다 더 잔인한 꽃샘은 바람을 데려와 토론으로 가는 내내 살갗과 피부를 괴롭혔다. 책을 든 손과 발끝이 렸다. 바람은 입으로 코로 들어오며 심장까지 차가운 공기를 집어넣는다. 불편한 숨을 이리저리 피하며 도서관에 도착했고 그들과 함께 하는 광장이며 도약의 경계인 그곳으로 입장했다.


책을 펼치며 먼저 장제목과 소제목의 구분 없이 수많은 챕터 제목에 놀랐다. 놀라움 이전에 생각이 복잡 미묘하게 꼬이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며 챕터별로 글을 읽어나간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챕터를 각각 읽으며 책은 소설이 아닌 작가가 쓴 아름다운 산문처럼 느껴졌고 정상 괴도의 뇌를 마비시켰다. 또는 짧은 시간에 깊은 영감을 주는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궁금해졌다. 전체를 소설로 보지 않고 챕터별로 나눠서 읽어도 충분히 매력 있고 빠질만했다. 아름다운 단어로 채워진 글과 글들이 조화롭게 치장한 책. 사실, 장제목을 확인하기 이전에 작가의 말을 읽으며 이미 격과 사랑의 감정으로 책은 내용보다 먼저 완전히 나를 흡수했고 빠졌.


작가 헤르타 뮐러는 말했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 냈습니다.


개인적으로 버지니아 울프와 많이도 닮았다고 느껴졌다. 취향과 선호하는 부분, 비극이나 부정적 상황을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는 작가만의 능력에 푹 빠졌다. 다만, 혹시나 그 기교나 작가의 습관적 언어에 유희가 있다면 혹시라도 내가 놓친 게 없을까 책에 깊이 이입되어 있는 내 의식을 바로 세워 잠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고 애썼다. 작가의 책 [숨그네], 제목에 집중하며 학기가 시작되기 전 책이 우리에게 닿은 이유에 대해 다시 짚어 본다. 숨그네는 허공을 떠도는 그네처럼 삶과 죽음 사이를 공존하며 움직이는 인간의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다. 3월 봄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2월 겨울을 마무리하며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아본다. 나의 삶, 우리의 삶은 항상 찬란한 빛의 길, 그것도 밝은 빛의 길만이 펼쳐진 것은 아니었다. 길 초입부터 늪이나 흙먼지 속에서 핀 꽃을  발견하기도 했고, 수많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뛰어넘는 것도 우리 삶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레오가 수용소에서 지낸 5년 간의 삶, 그곳은 단지 온통 비극적 단어로만 갇혀 있지는 않았다. 작가의 자유로운 시선 긍정적 생각과 사랑이 깊은 내면의 아름다운 단어와 표현을 꺼낼 수 있었으며 그렇게 빛난 표현으로 비극은 좀 더 비극적이지만 절망만을 갖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좀 더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비극은 가장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갖게 했다.


17세의 레오는 동성애자로 수용소에 수감된다. 그 시대에는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17~45세의 루마니아인들은 어떤 사건을 만들어서라도 러시아 수용소에 5년간 강제수감되어야 했다. 불행히 레오는 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동성애자는 범죄와 같은 죄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인의 피가 흐른다는 피할 수 없는 민족이 저지른 죄까지.


수용소로 가는 도중 레오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극한의 수치심과 극악의 상황들 직면하며 고통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한다. 레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비극을 더 이상 비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좀 더 비극적이었다. 작가의 시적 표현에 삶의 해학과 재치와 유머가 드러난다. 직접적 체험이 아닌 작가의 간접 경험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비극 가운데서도 조금 더한 아름다움의 시선이나 좀 덜 잔인할 수 있는 모습까지도.


책에서 수용자들은 자신이 처한 배고픔, 굶주림은 여전하면서도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삶이라면 차라리 는 게 낫다고 하지만 죽음에 직면한 동료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동료였던 시체의 옷을 챙기고 빵을 탐한다. 동료가 죽어버린 삶으로 하루를 번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삶의 가치인가.


책은 레오가 겪은 온갖 시련을 작가의 특별한 시선으로 다른 표현이나 언어의 유희로 마치 시를 짓듯 잔잔한 물살과 빠르기로 흘러간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직면했을 때 자신이 처한 지금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것처럼 현실은 더 비참해진다. 어쨌든 레오는 5년이라는 긴 시간 힘들고 아픈 현실을 작가에게 맡겼으며 장 비극적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채우며 지나왔다. 곧 기대도 희망도 없었고 그렇다고 체념하지도 않았던 석방이 이루어진다. 레오를 살아 돌아오게 한 근간의 중심에 있었던 할머니의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마음을 건네는 말 한마디는 그를 단단히 만들었으며 배고픈 천사를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 더해서 심장삽까지. 그것은 그를 견디게 하는 의식의 빛이 되었다.


마음으로 두었던 사랑의 가능성은 레오가 현실로 돌아온 이후 무너져 버린다. 살아 돌아온 레오에게 가장 큰 시련을 준 건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무지와 무관심, 무심한 눈빛의 수용소 밖의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번뇌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죽을 줄 알았던 그가 살아 돌아온 것에 놀랄 뿐,  동성애자인 그를 외면하고 가리기 위해 더 잔인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레오는 자신의 자리를 두려움으로 극복하고 견뎌낸 다음 에마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그렇지만 그는 곧 자유를 찾아 떠난다. 마음에서 문화에서 의식에서의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나는 안 돌아갈 거야"라는 말을 남기며 자신의 의지를 다진다. 자유를 선택해 떠난 자리에서 레오는 다시 보았다. 눈의 허기가 말한 것처럼 자신을 여전히 소리 내지 못하는 피아노라고 했다. 그는 결국 온전히 자신을 어떻게 세상에 놓아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레오는 가장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노래를 연주하고 소리 낼 수 있지만 소리 내지 못하는 피아노인 레오, 그도 평범한 누구나처럼 자신의 보물을 말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래서 다행이고 그게 바로 삶이라 생각한다. 아픔과 슬픔만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 절망과 희망 그리고 그것들의 한가운데 감정.

그게 바로 삶이라고.


단어 하나하나를 꺼내 곱씹어 본다. 단어의 팽창과 수축, 작가의 타고난 능력일 수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만들어진 작가의 관심이나 성향이 그녀를 낱말에 집착하게 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단어는 비극을 아름답게 그려 내기도 고 극한 상황에서 위트를 발견하고 말하기도 다. 챕터 챕터 글이 흐름을 타며 몰입결국 깊은 심연으로 다. 도구로는 늘 아름다움을 지참하고 다닌다. 작가가 전한 단어 배고픔과 사랑,  숨그네 등을 생각하며 나의 하루를 찬찬히 살펴본다. 이전보다 모순을 덜 겪고 있는지. 진실보다 더한 진실 같은 모순을 숨그네를 통해 나의 멍하고 허기진 눈으로 새겼다. 들숨과 날숨을 조화롭게 쓰며 숨그네를 탄다. 그네 위에서 본 세상과 한 바퀴 돌아온 세상은 서로가 허기지지 않았다고 아우성친다.  높낮이가 다른 아우성 속에서도 궁금했다.

숨그네를 타고 한 바퀴 돌아오며 여전히 헉헉대고 있는지.


방향과 속도를 찾았다 생각하며 천천히 한 발씩 내딛는 중이었다. 그런데 숨그네 사이를 들숨 날숨이 적절하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삶이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감정도 의식도 가치라고 정해둔 지점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 몰랐던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숨그네 위에서 반복되는 세상을 바라보며 가치를 수면 위로 올려서 말을 덧붙인다. "끝까지 오르니 더 아득하다."


덧.

 "집은 내가 수용소에서 배고픈 천사와 지낼 때와 다름없었다. 무덤덤한 사람 하나가 우리 모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인지, 우리 각자에게 무덤덤한 사람이 하나씩 들어 있는 것인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죄의식에 나와 가족을 들여다본다. 나 역시 무지와 무관심, 무심한 눈빛을 하며 가족을 바라보지는 않았는지. 혹시 나에게, 우리 각자에게 들어가 있는 무덤덤한 사람이 있다면 꺼내고 말 것이다 하고 다짐해 본다. 매섭던 바람이 조금 진정되었다. 기온은 여전하지만 심장까지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족이라는 우리가 함께 막아주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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