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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소울 Jun 12. 2024

스틱 없어도 봉정암 등정 가능하다고

부제:  내가 산악인이 될 상인가?

속초 시민이 왜 10월 중 설악산 단풍 절정기 피크 때, 그것도 급격히 기온이 떨어진 토요일 이른 아침에 백담사 오르는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40분째 줄을 서고 있냐고? 


얼마 안 있으면 곧 서울로 귀경하거든! 속초 일년살이 온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마치 맛있는 밥을 먹으면 먹을수록 밥공기의 남은 양에 줄어드는 것이 속상해서 우는 아이 같은 마음이랄까? 속초의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고 눈에 담고 싶어 부지런히 다니는 중이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날이라지만, ‘너무 과했나?’ 위아래 발열 내복을 입고, 경량 패딩 조끼, 경량 숏 패딩, 모자 달린 경량 롱 패딩 스카프 얇은 것 두꺼운 것까지 꽁꽁 싸매고, 목장갑을 두 개나 끼고 나왔다. 


스스로도 살짝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웬걸? 40여분 기다리는 동안 나보다 얇은 복장의 다른 사람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다. ‘껴입기를 잘했네!’


다만 유일하게 노출된 얼굴이 시렸다. 앞쪽에 마스크를 쓴 채 줄 서 있던 초면의 중년부부에게,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얼굴 따뜻하시겠어요. 나도 마스크 가져올걸.” 

“어머, 그래요? 그럼 우리 여벌 마스크 있는데, 드릴까요?” 하더니, 주섬주섬 꺼내 주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하고, 나는 사양 않고 호의를 받았다. 어찌나 따듯하던지. 마음 같아선 1시간도 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불구불 버스를 타고 백담사 입구에 내리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단풍이 백담계곡을 따라 반겨주고 있었다. 계곡의 다리를 건너 설악산 봉정암으로 오르기 위한 단풍길을 걷기 시작했다. 


근데 보통 몇 시간 등정하면 되는지 궁금해졌다. 기도하는 불교신자들은 보통 1박 2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침 혼자 스틱을 들고 걸어가는 여성에게 물어봤더니, 부지런히 가야 4시간 반 정도 걸린 단다.




마침 설악산국립공원 백담탐방지원센터가 눈에 띄었다.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도 받을 겸 들어가서 담당자에게 물어보았다. 

“5시간 반 걸리는데? 오늘 안에 못 와. 막차 못 탄다에 손가락을 건다.” 

초면에 요렇게 말을 하네? 이 사람 손가락이 11개인가? 갑자기 내 안에서 호승심이 일었다. 

“내가 기필코 막차 타고야 만다. 딱 기다려요.”

호기롭게 얘기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만 다른 사찰에서는 점심 공양시간이 정해져 있던데, 혹시 봉정암도 그런 거 아니야? 어제 다녀온 친구가 미역국 맛있다고 하던데?’ 하고 생각이 미쳤다. 지금보다 부지런히 등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봉정암 적멸보궁 참배 목적보다는, 공양을 먹겠다는 목표가 더 커진 셈이라 좀 우습긴 했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이기에, 불상이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설악산 봉정암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에 하나로, 가장 험지에 위치해 있다고 소문난 곳이다. 너무 오르기 힘들어서 자칫 숨이 깔딱 넘어간다는 해탈고개를 넘어야 다다를 수가 있는 불교 성지 중 하나이다. 




산행을 하면서 어설프게 스틱을 소지한 사람들이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 스틱을 전문적으로 사용할 줄도 모르면서, 왜들 그렇게 들고 다니는지. 뒷사람 생각도 안 하고 가로로 들고 앞뒤로 흔들면서 가면 어쩌자는 건지. 그럴 때면 “뒤에 사람 있어요.” 나도 모르게 크게 말하며 앞질러 갔다.


스틱을 짚고 의지하다가, 오히려 스틱이 분리되어 넘어지는 사람들을 몇 차례 목격하고 꽤 염려되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드디어 바위와 커다란 돌들로 층층이 비탈이 가파르게 경사진 해탈고개가 나타났다. 바위들을 넘어갈 때는 장갑만 낀 손으로 짚고 오르는 나를, 스틱을 든 채 힘에 부친 다른 등산객들이 오히려 부러워할 정도였다. 


올라갈수록 햇살이 따스해져서, 겹겹이 껴입었던 패딩들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순간 ‘해와 바람’ 동화가 갑자기 생각나는데?’


봉정암 공양 미역국 & 설겆이대


드디어 쉬지 않고 걸어서 3시간 반 만에 봉정암에 도착했다. ‘부처님, 한 번만 봐주세요. 공양밥부터 먹고 인사드릴게요.’ 하고, 속으로 양해를 구한 후 냉큼 줄을 섰다. 소박하게 대접 한 그릇을 들고, 하얀 쌀밥에 미역국을 수북하게 담아 밖으로 나왔다. 


겨우 얻은 숟가락 하나로 새로 산 캡 모자챙이 국그릇에 푹 담겨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국물까지 싹 다 비웠다. “역시 사찰 공양 밥은 맛있어.”하면서 행복해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순차적으로 먹은 그릇을 헹구고 닦는 곳으로 간 순간, 나는 원효대사가 된 줄 알았다. 


먹고 난 후에는 각자 설거지 순서 안내에 따라 고지대 특성상 미리 몇 칸으로 구분해서 받아 놓은 물에 1차, 2차, 3차 헹구고 물기가 빠지도록 엎어 놓으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긴 몇몇 사람들 때문에 마지막 헹구는 물조차 깨끗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저분한 물로 헹궈진 그릇에 담은 미역국을 방금 전까지 그토록 맛있게 먹었단 말이야?’ 원효대사의 진리 체험을 나도 하게 될 줄이야. 


깜깜한 밤 갈증이 심할 때 달게 마셨는데, 다음날 깨어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대사의 유명 일화가 떠올랐다. 정말 더럽게 맛있었다!





봉정암의 적멸보궁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이롭고 웅장했다. 스님의 청아한 독경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저절로 마음이 평안해졌다.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명상하듯 있다가,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사리탑으로 향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하며 기도드리는 많은 불교신자들이 보였다. 되지도 않는 우롱조의 염불 흉내를 크게 내며, 스스로의 교양이 부족함을 부끄러운지 모르고, 여과 없이 드러내는 등산객도 보였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나만이 아닌 듯했다.



밥도 먹고, 적멸보궁과 진신사리탑도 보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들도 감상했으니, 슬슬 내려가 볼까? 내려갈 때도 스틱 없이 빨간 목장갑 낀 손을 이용하여 바위길을 내려왔다. 


봉정암 오르는 길에 바삐 걸음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다양한 단풍나무들과 영시암, 백담사까지 들렀다가, 주차장까지 내려가는 마지막 버스를 기다렸다. 손가락 절단한다던 그 남자직원은 퇴근을 해버렸네? 에잇, 정말 운도 좋아.


하행 버스 대기줄은 백담사에서 다리를 건너 설악산 초입까지 이어져 있었다. 한 시간 반 대기 끝에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20여분 만에 주차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루 먼저 설악산 봉정암에 단풍놀이 다녀온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 오늘 어디 다녀왔게?” 했더니, “설마, 너 거긴 아니지?” 했다. 

산을 즐겨 타는 내 친구는 “아주 조금만 더 올랐으면 대청봉인데, 왜 봉정암에서 그냥 내려왔어” 하고, 자기가 더 아쉬워했다.

“나는 사찰이 산에 있어 거기 오를 뿐이고, 너는 산이 좋아 오르는 중에 사찰이 있을 뿐이지.’” 

대청봉에 미련 없어하는 나를 보며, 친구는 마냥 신기해했다. 


“야, 너야 말로 산악인이었네. 너 정말 스틱도 없이, 그냥 등산화만 신고 3시간 반 만에 올라갔다고?”

“응, 스틱 없어도 봉정암 갈 수 있다고!” 통화를 마치며 생각했다. ‘내가 산악인이 될 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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