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올여름 대서를 특별하게 기억해 주세요.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대서(大暑) : 세자의 공부도 늦출 만큼 더운 여름 24절기의 열두째인 대서(大暑, 큰 더위)는 일 년 가운데 가장 더운 때입니다. 대서를 셋으로 나눠 초후(初候)에는 반딧불이가 반짝거리고, 중후(中候)에는 흙이 습하고 뜨거워지며, 말후(末候)에는 때때로 큰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출처: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한 책에서 대서를 표현하는 이 단어들 중 반딧불이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습한 흙과 큰비는 올해 대서 즈음에 제대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름은 좀 별나네요. 마른 비-굵은 비 반복되는 긴 장마가 끝나나 싶더니 정말로 큰 비가 중부 지방을 강타했습니다. 강남역이 잠기고 한강변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늘 달리던 둘레길이 막히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던 양재천 다리가 끊겼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비 피해를 본 건 정말 오랜만이거나 처음인 것 같아요.
우리 집 텃밭과 정원도 큰 비에 놀랐나 봐요.
장마 후에는 텃밭 작물들과 잡초들이 한데 엉켜서 누가 더 크게 뻗치나 경쟁을 하며, 온 마당을 정글로 만들어 버리기 일쑤인데, 올여름은 큰 비의 기세에 눌렸는지 '풀 죽은' 모습입니다. 정말 풀이 죽었어요. 이번에 선녀 나방과 총채벌레가 워낙 극성이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이 여름의 빌런, 잡초들도 병충해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봅니다.
게으른 정원사도 풀이 죽었습니다. 안 그래도 텃밭 정원 아이들이 크게 자라 감당이 안 되는 여름인데, 병충해와 큰 비까지 강타하니, '나 몰라라' 손을 그냥 놓아버렸습니다.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또 언젠가는 이 상황을 수습할 힘이 나겠지, 풀 죽은 스스로를 다독거려 봅니다.
우리 정원에 온 지 삼 년째, 작년까지 얼굴을 내보이지 않던 수국이, 올해 꽃을 피워냈습니다.
병충해에 물난리 난 이 와중에 수국 꽃이라니요! 와! 손 놓아버린 정원에 한 줄기, 아니 두 줄기 꽃입니다. 작년까지도 잎이 빨간 점으로 뒤덮여 늘 잔병치레하던 수국이었거든요. 꽃은커녕 이러다 겨울을 못 지나고 떠나겠구나 싶던 아이였는데, 올 겨울을 용하게 이겨내고 큰 병 없이 무럭무럭 자라더니, 드디어 꽃을 피워냈습니다. 뭐든 때가 있다더니, 자기의 때를 잘 기다렸다 건강하게 꽃을 피워준 수국이 너무나 반갑고 기특합니다.
게으른 정원사도 잡초, 병충해, 큰비를 이겨내며 24절기 때때마다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정원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겸허한 마음으로 그때를 기다려봅니다. 물론, 몸과 마음을 열어 노력해야겠지요.
새 아이들을 들여왔습니다. 있던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손 놓아버린 정원의 헛헛함을 이렇게 달래도 되는 걸까요? 마을 종묘사를 지나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다년생 꽃 두 아이와 상추 몇 개를 즉흥적으로 데려왔습니다. 잡초 무성한 정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아주니 마음이 좀 복잡하긴 한데요, 그래도 새로 만나게 된 버베인, 플록스와도 잘 지내보겠습니다.
여름 꽃은 보랏빛이 많아요.
분홍빛 꽃도 블루톤 계열이라 해야 할까요, 은은한 보랏빛이 베어납니다. 무성한 잡초 사이에 슬그머니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도 보랏빛 향기를 뿜어냅니다.
보랏빛 꽃들, 보랏빛 향기,
보라! 빛이 나는 생명들
정원 뒷 줄에 혼자 줄을 늘여 트리고 있는 덩굴장미를 지지해줄 가든 아치를 설치했습니다. 우리 정원의 첫 시설물이에요. 키가 많이 큰 소나무들과 높은 하늘을 떠받치듯 동그란 윗 테가 참 예쁩니다.
초록 초록 길쭉한 줄기와 잎들 사이로 하얗고 둥근 대가 보이니, 뭔가 정리되어 보이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돌과 나무만 무성한 큰 산속에서 표지판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랄까요.
위안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자연 속에서,
사람 손길이 닿은 인공 시설물을 만날 때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1. 여름 꽃, 수국 만나기
2. 정원을 정원답게, 가든 아치 설치하기
3. 게으름 피우다, 대서특필? 브런치 뒤늦게 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