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아민 Nov 30. 2024

스산한 공기

익숙한 그림

 그 후로 별다른 것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여전히 선배는 내 앞자리나 옆자리에서 밥을 먹었고, 공적인 대화 외엔 오고 가지 않았다. 바닷가에서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같은 학교 후배라 챙겨주고 싶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로테이션의 마지막날이었던 금요일, 줄곧 불만투성이었던 채은의 표정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친절했고 말투도 고왔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일지를 작성하고 있는데 화장을 고치고 있던 채은이 선배를 향해 돌아앉으며 방긋 미소 지었다.


"우리 밥 말고 술 마셔요. 아니면 밥은 간단하게 먹고 이자까야가요."

"편한 대로 해."


그들의 대화를 들어보니 이채은 무리와 선배가 한잔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좀 놀라기도 하고 묘하게 질투가 나기도 했다. 질투라니, 내가 뭐라고 그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고작 같은 학교 후배일 뿐인데.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이고 있을 때 이채은이 가방을 챙기며 모두에게 물었다.


"같이 가실 분 있어요? 예의상 묻는 거긴 하지만."


정말 예의상 묻는 것 같았다. 그녀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선배의 팔짱을 끼고 일으켜 세우더니 그를 재촉하며 홀연히 회의실을 나갔다. 그녀의 친구들도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뒤따라나갔다. 순간의 적막이 흘렀다.


"그렇게 찔러대더니 결국 밥 얻어먹나 보네."


현정은 혀를 차며 그들이 나간 문을 쳐다봤다. 그랬다. 그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선배에게 치근덕거렸다. 거의 매일 밥 사달라 데려다 달라 매달렸고, 선배는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거절했다. 이제 거절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던 건지 아니면 한번 사주고 말자, 싶었던 건지 별말 없이 끌려나갔다. 아, 선배가 채은에게 넘어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예쁘장하게 생긴 건 인정하지만 선배의 전여자친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감히, 말이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늦잠을 자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출근했지만 집 앞이라 그리 늦지는 않았다. 문 앞에서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뛰었던 터라 이마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회의실 풍경을 생각하며 문을 열었는데, 이상하게 스산한 공기가 느껴졌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 떨고 있는 것도 똑같은데 묘한 분위기였다.

 

"왔나? 좀 늦었네."

"늦잠 자서."


다행히 담당자도 업무가 늦어졌는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 들어와 인원을 확인했다.


"다 왔네요. 이번주만 하면 실습은 끝입니다. 마지막날에 있을 프로그램 발표 준비도 잘해주시고요. 자, 이동할게요."


마지막으로 배정받은 실습지는 청소년문화의 집이었다. 아무래도 청소년을 대하는 곳이다 보니 조금은 긴장이 됐었다. 학생들이 오기 전까지는 선생님을 도와 프로그램 준비를 했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다.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들리는 키보드소리만 요란했다.


오후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하나둘 오기시작했다. 보조선생님이 매주 바뀌다 보니 학생들도 어색해하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학생들의 질문공세가 시작됐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때라 그런지 주로 연애이야기였다. 연애경험은 적지만 이론은 빠삭했다. 약간의 경험과 이론을 섞어서 이야기해 주니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아! 쌤, 지훈 쌤이랑 친해요?"

"음.. 어느 정도? 왜?"


컵라면이지만 밥 한 끼 같이했으니 친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선생님 진짜 내 스타일이던데, 마지막날에 번호 좀 달랬더니 미성년자딱지 떼고 오래요!!"


그 말이 꽤 서운했었는지 발을 쿵쿵 구르며 얘기했다. 하긴, 선배 정도면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을 타입이긴 했다. 한번 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마치 오래도록 봐온 언니 대하듯 나를 대했다.


덕분에 문화의 집에서의 일주일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다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음, 어쩌죠. 갑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아요. 개별로 하기로 했던 프로그램 발표는 기관사정상 세 명씩 짝지어서 해야겠어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발표도 3분 안으로 해야 해요. 제가 임의로 짝지어놨으니 오전에 발표준비하고 오후에 발표하는 걸로 실습 마무리 할게요. 미안합니다."


아침부터 대청소를 시키길래 누가 방문을 하나, 싶었는데 그게 맞았보다. 문제는 하필 내가 이채은과 같은 조란 것이었다. 지난 4일간 뭐가 불만인지 나만 보면 노려봤다. 툭툭대는 말투로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옷이 그것밖에 없냐며 빨아 입기는 하냐는 둥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래도 실습만 끝나면 다신 안볼사이라 참고 넘겼는데 이렇게 또 엮이다니, 오늘 하루가 참으로 길 것 같았다.


"그리고 실습 끝나면 다 같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회식할 예정이에요. 다들 빠지지 말고 7시까지 00 호프집으로 오세요."


담당자의 공지가 끝나고 조별로 모여 프로그램 논의를 했다. 각자가 짜왔던 프로그램 중에 조금 더 그럴듯한 걸로 정하는 것 같았다. 역시나 이채은 대놓고 싫은 티를 내며 옆에 앉았다. 정확히는 한 칸 띄우고.


"하, 언니는 어떤 거 생각하셨어요?"


실습에 큰 뜻이 없었다 보니 다른 기관에서 했던 프로그램을 우려먹을 생각이었다.


"내 건 별로라."

"그럼 제 걸로 해요. 발표는 얘가 할 거니까 언니는 발표판 만들어주세요."

"... 그래 그럼."


회의실에는 컴퓨터가 없어 PPT를 활용한 발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하드보드지에 발표할 내용을 간단히 적어 넣는 것이었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발표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내 죄지. 그래도 하나 좋은 게 있다면 이채은이 프로그램 기획서를 쓸 시간에 난 자유시간을 보냈다. 물론, 발표판 제작을 위한 준비물을 생각해야 했지만 비교적 답이 나와있어서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채은이 의외의 질문을 해왔다.


"언니, 이상형이 뭐예요? 외적인 거요."


뜬금없이 이상형이라니. 나에 대해 좀처럼 궁금해하지 않던 이채은의 질문이라 의아하면서도 새로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끌렸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난 모범생 같은 사람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뿔테안경과 백팩이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


"뿔테안경이랑 백팩이 잘 어울리는 모범생 같은 스타일?"


내 대답을 들은 이채은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왜 그런 사람을 좋아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답답한 스타일이 왜 좋아요? 으, 진짜 싫어."


싫은 것 까지야. 저럴 거면 물어보지나말지. 그 뒤로 저들끼리 이상형 월드컵이 열렸다. 연예인부터 시작해 주변지인들까지 모조리 끌어와 비교해 보는 것 같았다. 시간낭비였다.


대충 프로그램 기획서를 작성했다며 보여줬다. 말과 행동에 비해 아이디어는 꽤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하드보지에 달랑 글자만 적지 말고 카테고리별로 색지 다르게 해서 붙여주세요. 프로그램 제목도 입체감 있게 만들어주세요."


당혹스러운 주문이었다. 난 달랑 글자만 적을 생각이었다. 꾸미는 것에 자신 없던 나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 모습이 퍽 답답했던지 발표를 맡기로 했던 채은의 친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같이해요 그럼."

"어, 그래. 고마워."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내 능력밖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맡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눈썰미가 좋거나 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손만 대면 다 찢어지거나 부서졌다. 결국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며 배척당했다. 옆에서 잘린 종이를 수거해 분리수거를 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갖다 주는 것으로 내 몫을 대신했다. 그래도 불만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뭐, 일종의 합리화였다.


발표도 순조로웠다. 비록 내 역할은 발표판을 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실습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좀 치사하지만 말이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괜찮은 아이디어도 있고 조금만 수정하면 지금이라도 실행가능한 아이디어도 있었어요. 여러분들 덕분에 미래가 밝네요. 시간이 남았지만,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실습일지 적어놓은 거 모아놨으니까 각자 가져가서 책 만들어오시면 됩니다."


드디어 끝났다. 길고 긴 실습이었다. 시원 섭섭? 아니, 그냥 시원하기만 했다. 현장실습이라는 과목을 통과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한다. 통과 여부는 실습평가점수였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기에 통과할 거란 확신이 있었다.


"평가점수는 모두 70점 이상으로 맞췄고, 기회가 된다면 필드에서 다시 봐요."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마지막날이라 그런지 다들 신나 보였다.


"오빠! 호프집으로 바로 갈 거죠? 같이 가요."

"집에 좀 들러야 해서. 미안."


늘 그렇듯 채은은 선배의 팔짱을 끼며 생글생글 웃었고, 선배는 채은의 손을 밀어내며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호프집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바닷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나오는데 허름하지만 제법 규모가 컸다. 걸어서 가도 되는 거리였다. 7시에 모이니까, 씻고 간단히 화장할 시간은 충분했다.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화장도 못한 채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나갔다. 호프집 앞에 도착해 급한 대로 립밤만 바르고 문을 열었다.


"어? 여기가 아닌가?"


가게 안에는 조용한 음악만 흐르고 있었다. 그때 500cc짜리 맥주를 양손에 가득 든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복지관 손님이시죠? 2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곳에 2층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화장실 옆으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혜정아, 여기!"


현정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은근한 조명 아래서 보니 다들 또 다른 느낌이었다. 뭐랄까, 대학생 같다고 할까, 어른 같았다고 할까. 그런데 선배는 아직인 것 같았다. 급한 일이 있으신가.


이미 맥주 한잔을 비운 채은이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키득거렸다. 이번엔 또 뭘까.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존재감이 워낙 커 신경이 쓰였다.


"언니. 입술은 왜 발랐어요? 잘 보일 사람 있어요?"


아, 입술. 그러는 자기는 풀메이크업을 하고 앉아있는 주제에. 그렇게 한마디 던지더니 지훈 선배는 왜 아직 안 오냐며 전화를 거는 듯했다. 그때 청아한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며 어딘가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어! 오빠 전화는 왜 안 받아요!"

"헐... 오빠, 스타일 완전히 바꿨네요."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안녕?"


검은 뿔테안경과 파란 빛깔의 각진 백팩, 흰 티에 검은 셔츠를 입은 지훈 선배가 날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실로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