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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러너 Oct 07. 2024

커피에 담긴 마음

두 번의 생일선물

어른이 되면서부터 생일은 단지 달력의 숫자일 뿐, 더 이상 기념할 의미를 찾지 못한 날이 되었다. 누구에게 축하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저 지나가는 하루였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고르는 설렘도, 받는 기쁨도 까마득히 잊은 채 살아왔다. 그렇게 나는 생일이 지니는 특별함을 잃어버렸다.


올해, 일상의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생겼고, 때로는 낯선 이가 먼저 말을 걸어오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일이라는 개인적인 날짜를 굳이 알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이 특별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커피 한 잔을 매개로 맺어진 인연들이 내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두 번의 생일 선물. 그것도 커피를 사랑하는 나를 위해 고심 끝에 고른 원두들이었다.




1.



첫 번째 원두는 생일 직후, 6년, 어쩌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게임 속에서만 만났던 친구가 보내준 것이었다. 한 번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오랜 시간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이어온 인연이었다. 올해 그 친구는 내가 건넨 이야기들을 통해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처음 시작하기 좋은 기구들과 원두들을 추천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때의 설렘 가득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그 친구가 선물해 준 원두는 다름 아닌 내가 예전에 추천했던 것이었다. 중국 운남이라는 독특한 산지에서 온 이 원두는 아이스티를 연상시키는 맛이 특징이었다. 더운 날씨에 시원하게 즐기기 좋을 것 같아 추천했었지만, 정작 나는 그때 이미 조금 더 비싼 원두들에 관심이 옮겨가 있었다. 게다가 구매하려 했을 때는 품절이어서 직접 맛보지도 못했던 원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선물 받은 날부터 날씨가 쌀쌀해져서 시기적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피로할 때면 살짝 오르는 체온과 함께 이 원두로 내린 커피 한 잔이 특별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한낮의 따스한 온기처럼, 오래된 인연이 보내준 선물은 그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가졌다.




2.

https://brunch.co.kr/@markvii/18

커피 모임에서 만난 한 분과는 서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다 우연히 내 생일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분의 기획과 내 생일이 같은 달이어서 스쳐 지나간 대화였다. 그 후로는 서로 바쁜 일상에 휘말려 연락도 뜸해졌다. 나는 간간이 올라오는 그분의 근황만을 살피며, 바쁘시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생일이 하루 지난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바빠서 생일인 걸 뒤늦게 보았다며, 원두를 선물하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취향과 주소, 연락처를 물으시는데, 이미 한 번 만난 사이라 망설임 없이 알려드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대하지 않으려 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으니까.


그렇게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금요일, 갑자기 배송완료 문자가 왔다. 택배 주문한 기억이 없어 의아했지만, 문득 그것이 생일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고객님의 상품이 배송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장과 괄호 속 번호만이 적힌 메시지였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집 문 앞에 박스가 놓여 있었다. 받는 이 이름 칸에 내 닉네임이 적혀있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커피 온라인 모임에서 만난 느슨한 사이라 아직은 닉네임이 익숙하셨나 보다. 나도 내 본명을 그대로 보기 좋아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박스를 열어보고 나서야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를 실감했다. 100g에 38,500원이나 하는 고가의 원두가 한쪽에 있었다. 늘 맛보고 싶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던 그 원두였다. 반대편의 원두는 150g에 14,500원으로 상대적으로는 저렴했지만, 파나마라는 산지의 특성상 이 역시 결코 가벼운 선물은 아니었다. 2-3주 동안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양이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잊지 않고 보내주신 고가의 원두들은, 그 자체로 섬세한 마음이 담긴 선물이었다.








향긋한 커피 향 속에서 나는 생각한다. 선물이란 단순히 물건의 교환이 아닌, 서로를 향한 마음을 전하는 따뜻한 매개체라는 것을. 누군가는 스쳐 지나간 대화 속에서 내 생일을 기억해 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내 취향을 섬세하게 새겨두었다. 그들의 마음이 담긴 선물은 일상의 순간들을 특별하게 물들였다.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선물의 가치는 그것이 담고 있는 기억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올해 받은 두 번의 생일 선물은 단순한 원두가 아닌, 누군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일까. 이제 나는 달력 위의 생일이라는 날짜가, 다시 조금은 특별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선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시작된 인연도, 게임 속에서 이어져 온 우정도, 그 자체로 삶이 건네준 선물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의 삶에 들어와 작은 행복을 선물한다. 때로는 따뜻한 관심으로, 때로는 특별한 기억으로, 또 때로는 향긋한 원두 한 봉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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