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입과 해석
백지의 상태에서 갑자기 "생각 다운 생각"을 하려면 참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화에서 "세 존(John)"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세 존이 자유 개념을 형성하는 데는 도움을 주긴 했지만 다른 개념을 형성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존 로크가 우리에게 인내가 뭔지, 사랑이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절대왕정 시대에 자기 할 말 다 하고 살았던 걸 생각하면 왠지 로크는 사랑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투머치 토커였을 것 같긴 하다.)
두 세명의 철학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생각의 자료를 제공해줄 수 없다.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과목별 전교 1등을 찾는 것"이다. 분야별로 똑똑한 놈들이 쓴 책을 보면서 답을 찾는 거다.
4차 산업 혁명에 대해서 알고 싶다? AI가 뭔지 궁금하다? 에 대해 전문가들이 쓴 글을 보자. 프로그래밍을 잘하고 싶다? PYTHON이 뭔지 궁금하다? 전문가들이 쓴 설명서를 보자.
그런데 조금 더 삶의 근본적인 분야로 들어가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사랑이 뭔지, 인내가 뭔지, 정의가 뭔지, 평등이 뭔지에 대해서는 설명서가 없다.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쓴 책을 봐도 잘 이해가 안 가고 와닫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의 안쪽에만 달려있다
- 헤겔 -
이게 무슨 개떡 같은 말일까? 혹시 이 글을 보고 "바깥쪽에도 손잡이 하나 달아야겠네?" 따위의 생각만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상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상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남의 말을 해석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니지... 비정상적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내 제한적인 두뇌가 알아듣도록 통역하는 과정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한 것 같다.)
헤겔을 비롯하여 우리에게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지식을 한데 모아 우리 사회는 “인문학”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인문학 내용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생각의 양식"을 만드는 과정이다.
유튜브만 봐도 인문학 내용을 해석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의 말을 듣는 것 또한 우리의 생각의 과정에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스스로 그 어려운 내용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의 해석 말고, 나만의 해석을 통해 내 생각의 지경을 넓히고 나의 근본 개념들을 탄탄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방법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자. 일단 이 방법을 <분석적으로 읽기>라 부르겠다.
어떤 글을 분석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아주 자세하고 다차원적으로 해당 글의 상황이나 작가의 숨은 의도를 해설하는 것처럼 읽어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조금 더 쪼개서 설명하자면 분석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다음의 과정을 거치며 글을 읽는 것이다.
1. 전반적인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글 한번 훑는다 (맥락이 없다면 작가의 배경을 찾아보자)
2. 다시 읽어 내려갈 때 거북목 상태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치밀하게, 모든 단어에 집중하며 읽는다
3. 작가가 왜 굳이 특정 단어를 사용한 건지에 대한 의도를 생각하며 읽는다
4. 문장에 나와있지 않은 작가의 "전제(assumption)"를 추리하며 읽는다
5. 머릿속에서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가며 읽는다
6. 전체 문맥 속에서 나의 판단의 정당성을 확인하며 읽는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글을 쓰기 전 머릿속에 떠올린 그 근본적인 구상을 재구성한다. 맞다. 어렵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읽기를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식인들의 통찰을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아주 짧은 글을 통해 분석적으로 읽기를 해보자.
얼굴이 계속 햇빛을 향하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의 그림자를 볼 수 없다.
- 헬렌 켈러
한 줄이라 전반적인 맥락은 글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헬렌 켈러가 누굴까?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자. 청각과 시각 장애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희생과 봉사로 인류에게 아주 큰 교훈을 남긴 분이다. 이런 사람이 전달하고자 한 "햇빛"과 "그림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추리 1> 햇빛과 그림자는 빛과 관련한 밝음과 어두움을 이야기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시각 장애인인 헬렌 켈러가 둘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추리 2> 햇빛과 그림자는 은유적으로 선과 악을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항상 선을 바라보면 우리는 스스로의 악한 부분을 볼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나의 악한 모습의 영향력 또한 줄어들 것이다.
만약 저 말이 <추리 1>처럼 시각적인 의미만 내포하고 있었다면 굳이 우리가 이것을 명언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 한 대로 헬렌 켈러는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시각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더 적을 것 같다. 반면 (추리 2) 쪽으로 해석하게 되면 저 말이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어 더 아름다운 말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헬렌 켈러가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시각적 메타포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녀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의 세상을 타인의 눈으로 보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눈은 감고 있지만 누구보다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를 비추는 햇살이 자연스레 그려진다.
분석적으로 읽기는 짧은 문장뿐 아니라 소설, 종교서적, 철학서적을 읽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지식을 전달하는 자의 의도를 해석하고 나만의 방법으로 인문학의 깊은 지혜에 도달해 보길 바란다.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해석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 결과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곱씹어 볼 때, 인문학은 생각의 양식이 되어 나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3. 생각의 흐름: '가상 사고 실험'으로 FOCUS!
8. 생각의 나눔 2: 사회의 표현 - 언론으로부터 나의 생각을 지키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