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편지
좁다란 골목길을 어쩜 그리도 신나게 달리는지, 세상 웃음이 네게서 퍼져 나오는 것처럼 청량하게 웃는 네 뒤를 따라 가파른 언덕과 굽이진 계단을 올랐다.
"이모, 빨리 와"
하늘이 닿을 만큼 깡충거리며 뛰어가는 밝은 아이야, 그때 너는 가장 사랑스러운 네 살이었단다.
맑은 반달눈에 오뚝한 코, 새초롬한 입술 사이로 앙증맞게 이모를 불러주던 모습, 몰아쳐 오는 숨을 삼키며 태연한 척 두 살된 네 동생을 안고 반쯤 넋이 나간 미소를 띠며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하늘과 가장 가까이 맞닿은 서대문 달동네,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숨이 가빠지는 곳에 네가 사는 천국이 있었단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던 곳, 기름보일러의 쾌쾌한 향이 온 집안을 가득 메워도 겨울 한기에 턱을 덜덜 떨고, 여름이면 온 사방에서 군불을 지핀 것처럼 활활 타올랐던 열기로 가득했던 집.
그곳에서 여자 넷이 사계절을 보내고 있었단다. 오르기 힘든 곳이었지만, 야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종종 네 손을 잡고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르곤 했었다. "이모 빨리 와" 너는 신이 나서 계단을 성큼 뛰어가며, 숨을 컥컥거리는 이모를 보고 어서 오라고 재촉했다.
겨울이면 거북이걸음으로 한 발짝 발을 떼기도 힘들게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서 미끄럼을 타고 깔깔거리던 너의 밝은 모습이 힘든 세상을 빛처럼 밝혀 줬다. 넌 그런 아이였어. 지친 엄마에게, 어린 동생에게, 무뚝뚝한 이모에게 먼저 웃어주는 천사 같은 아이.
온수가 나오지 않아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워 후다닥 너를 씻기는 이모 마음은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스산한데 그 순간을 "까르르, 까르르" 재미있는 놀이로 즐기는, 조급했던 이모 마음까지 쉬 녹여 버리는 착한 아이.
"내 딸인데 나를 닮지 않고 너를 닮은 것 같아, 니가 좀 설득해 줘"
매번 언니는 고집부리는 너를 설득할 수 없다며 이모에게 부탁했단다. 너를 좀 설득해 달라고,
아가, 십 대의 너는 야무지고 똑똑했는데, 고생하는 엄마 챙기느라 반장도 회장도 다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의 끈을 이어갔어. 그러는 동안 너의 그 밝은 미소도 웃음도 사라져 갔단다.
이십 대의 너는 한참 꿈꾸는 나이에, 생계를 책임지려 했고, 엄마에 대한 원망이 쌓여갔지,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너에게 닿지 않았을 엄마의 정성.
그렇게 닫혀 버린 네 맘, 네 주위를 뱅뱅 도는 언니, 대각선 끝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 손을 내밀지 못하고 흘러간 시간.
이모에게 여전히 소중한 아가야,
엄마는 최선에 최선을 다했단다. 젊은 나이에 두 아이를 키운다는 게 한국 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단다.
네가 결혼을 안 하겠다고 했을 때, 죄책감에 몸서리치던 엄마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겠니,
네가 결혼 할 남자를 데려왔을 때, 안도 했던 엄마 마음을 네가 어떻게 알겠니,
"막내야, 결혼한다고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어"
사실 이모는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내심 침착하게 행동했단다.
"징글징글하게 싸운다."
결혼 준비하면서 너와 엄마가 얼마나 많이 다투고, 서로에게 생채기를 냈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어.
"그동안 모녀지간으로 하지 못했던 것들 다 한다고 생각해, 상처도 주고 상처도 받고 같이 울고 웃고 그래야 해, 너무 속이고 속고 살았잖아, 그냥 다 해봐"
엄마 하소연에 이모가 했던 말이야, 나는 너를 아는데,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한 번은 푸념이든 악다구니든 쏟아내고 가야지, 남몰래 우는 건 그만해야지!
이모에게 여전히 소중한 아가야,
삼십 대에는 꿈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모처럼 살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이제 너를 위해 살아, 가족보다 남편보다 너를 더 사랑하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이모가 주책맞게 울면서 했던 말들 기억하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며 수줍게 미소 짓던 아이야, 기쁨보다 슬픔을 행복보다 불행을 웃음보다 눈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아이야, 이제 바꿔서 살아봐!
슬픔보다 기쁨을,
불행보다 행복을,
눈물보다 웃음을,
어때 할 수 있지, 이제 아이처럼 살아보는 거야, 십 대 이십 대 어른처럼 살았으니, 이제 네 마음에 집중하고 너를 챙기며, 아끼며 살아!
심호흡 몇 번 하고 들어간 신부대기실에 다소곳이 앉아 웃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어릴 적 그 아이가 새초롬하게 미소 짓고 있더라.
어찌나 말랐던지, 신부가 너무 말랐다는 하객들에게 "원래 신부는 다 말라요." "저 땐 다 저래요."
이모가 네 옆에 꼭 붙어서 이상한 소리 하는 하객들에게 핀잔을 주면서 신부대기실 앞을 지키고 있었지,
손을 꼭 잡고 버진로드 위를 걷던 엄마와 네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르지?
두 사람이 묵묵히 지내왔던 삶의 여정이 초연하고 찬란했다. 똑 닮은 엄마와 딸,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데 왜 그렇게 그림자처럼 서로를 보호하려 숨죽이고 살았는지, 이제는 다른 집 모녀처럼 투닥거리며 살아라.
하얀 드레스 입고 활짝 웃는 너를 보니, 이제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단다. 스치듯 흘러가던 너의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 이모는 정말 행복했어.
원망과 책망보다 희망과 행복, 재미로 너의 이야기를 써갔으면 좋겠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네 맘 알고 있어. 이모가 글을 쓴다는 말에 놀라던 너, 언제고 이모 글을 보여 줄 날을 기다린다. 이모보다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이모가 보여줄게!!
오늘 너는 최고의 신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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