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모닝루틴 탄생기

by 엠디언니

1.

09:50 아직 반은 비었고 반은 채워진 책상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가방을 놓고 시간을 체크한다 - 자율좌석제를 시행 중이긴 하지만 거의 고정좌석이나 다름없다. 지각만 안 하면 내 자리다 -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출근 완료.

월화수목금 울리도록 설정해 놓은 알람 시간에 맞춰 일어나면 똑같은 루틴대로 출근 준비를 하고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면 이 시간에 도착한다. 항상 같은 모습의 일상이지만 사실은 조금 달라졌다.


원래 같았으면 출퇴근시스템에 로그인해서 출근 체크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조용히 일어나 – 가끔 소라님도 불러내서 같이 - 1층 스타벅스에 가서 카페인을 충전해야 한다. 며칠 전부터는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헤이즐넛향 커피 캡슐을 내려서 텀블러에 담아 온다. 출근 체크 후에는 태블로를 접속해서 어제 날짜 우리 팀의 매출을 조회해 본다.

상위 20개 업체의 브랜드코드만 따로 필터 적용을 하면 이 브랜드들이 어제 판매한 상품들과 매출 실적이 추출되는데, 화면 구석에 있는 내려받기 모양 버튼을 클릭해서 실적데이터 파일을 내 컴퓨터에 다운로드를 한다.


엑셀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리빙팀 원님의 도움을 받아서 – 아무래도 민재님한테 계속 물어보기는 영 부담스러워서 – 2분기 GMV 분석표를 매일의 매출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표로 수정을 했다. 원님의 설명을 들으니까 전혀 어렵지 않았던 게 분기별로 뽑았던 로데이터만 어제, 지난주 같은 요일, 작년 같은 날짜 데이터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새로 온 팀장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고 묻는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더 이상 민재님 앞에서 부끄러워지고 싶지가 않다. 지난주 2분기 실적 표를 다시 만들어서 슬랙 팀 채널에 올린 다음 날, 점심 먹고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였다.


2.

지수님, 어제 ‘ㅂ’ 브랜드 매출이 많이 빠졌네요. 이유가 뭐예요?


회의 스케줄로 자리에 안 계시던 민재님에게서 슬랙이 왔다. 졸음이 확 달아나 버렸다. 아직 확인을 못 했는데 보고 말씀드릴게요! 하고 답을 보내고는 얼른 실적을 조회해 봤다. 곧 퇴근이 다가오는 금요일 오후에 무슨 날벼락일까.

실제로 ‘ㅂ’ 브랜드는 전날에 비해 매출이 거의 반토막이 나 있었다. 상품리스트를 확인해 보니 잘 팔리는 주력 상품들이 모두 품절로 표시되어 있어서 급하게 ‘ㅂ’ 브랜드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민재님! ‘ㅂ’ 브랜드 상품들이 품절처리가 되어 있어서 담당자한테 확인해 보니까 다른 사이트에서 이번 주에 단독 기획전하면서 재고가 다 빠져서 지금 리오더 중이라고 하네요.


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플랫폼은 품절처리는 안 하고 예약배송받고 있어요. 저희도 품절 풀고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담당자랑 이야기해 보세요.


‘ㅂ’ 브랜드 상품을 다시 판매 중 상태로 전환하고 예약배송 정보도 업데이트를 했다. 민재님은 이미 나한테 물어보기 전부터 이유를 알고 있었는데 일부러 모르는 척 물어본 게 분명하다. 어쨌든 품절 사태를 잘 해결하고 잠깐 숨을 돌리는데 소라님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와 이 조용한 소란 - 내가 허겁지겁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둔탁하고도 빠르게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 무엇 때문인지 물어보고는 함께 한숨을 쉰다.


저도 민재님이랑 DM 하루에 100번은 하는 거 같은데. 물어보는 게 너무 많은데 다 잘 모르겠어요.


그 일이 있은 뒤 일요일 저녁에 결심을 했다. 출근하자마자 어제 매출은 어땠는지,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원인은 뭔지, 누구보다 빨리 확인하기로. 누군가의 돌발 질문 때문이 아니라 내 브랜드의 매출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야 하니까.


3.

어제부터 나시 상품들이 매출이 많이 올랐더라고요! 금요일부터 3일 동안 주말특가로 슬리브리스 기획전 진행하면 참여 가능하세요?


10% 이상 할인가로 참여 가능하다고 말한 업체가 이제 열 군데다. 이 정도면 마케팅팀에 기획전을 진행해 보자고 설득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일 대비해서 주요 20개 업체의 GMV는 1.2백만 원 감소(-3.4%)했는데 특히 '블라우스/셔츠'와 '팬츠' 카테고리에서 각각 0.8백만 원, 0.5백만 원으로 가장 많이 감소했다. 혹시 내 업체들만 감소했나 싶어서 태블로에서 전사(회사 전체) 실적을 조회해 봤다. 다행히(?) 전사적으로 GMV가 감소했고 DAU(Daily Average User: 일평균방문자수) 자체가 저번 주부터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휴가 시즌에 돌입해서 그런 것 같다.


엑셀 표로 다시 돌아가니 문득 눈에 띄는 빨간 숫자 - 증감률이 (+) 일 경우 글자색이 빨간색으로 표시되도록 서식을 설정해 두었다 - 가 하나 있다. 우울한 파란 숫자들 - 증감률이 (-) 일 경우에는 파란색으로 표시된다 - 와중에 무려 두 자리 숫자를 가진 빨간색이다. 바로 '티셔츠' 카테고리였는데, 전일 대비해서도 전주 대비해서도 모두 신장하고 있었다. 원래도 여름에 매출이 가장 높은 티셔츠이긴 한데, 요새 더 신장할 만한 이유가 있나? 왜 증가했지? 궁금해졌다.


티셔츠에서 어떤 상품이 잘 팔렸길래 매출이 늘었나 보려고 로데이터를 복사붙여넣기 해 둔 시트에서 GMV 데이터를 내림차순으로 정렬하기를 눌렀다. 갑자기 엑셀화면이 약간 흐릿해진 상태로 멈춰버린다. 설마 공포의 "응답하지 않습니다" 알림이 뜨는 건 아니겠지. 작업해 놓고 아직 저장을 안 눌렀기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기다렸더니 - 이럴 때 오히려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엑셀이 그냥 닫혀버리는 경험도 했기 때문이다 - 몇 분 뒤에 정상적으로 정렬이 되어서 나왔다. 온갖 카테고리가 섞여 있어서 티셔츠만 필터를 걸었다. 필터 선택을 해 놓고 또 멈출까 봐 걱정했는데 – 깜빡하고 여전히 저장을 안 눌렀다 – 다행히 이건 금방 정리되어서 나왔다. 티셔츠 중에서도 세부 카테고리가 슬리브리스(나시)인 상품들이 데이터 상단에 포진해 있다.


7월 초부터 길게 이어지던 장마가 끝나고 주말부터 체감온도 40도에 육박하는 극한의 무더위가 시작되었는데, 이 날씨의 영향으로 티셔츠 중에서도 나시를 찾는 고객들이 많아졌나 보다. 내 추측이 맞을까, 정말 그럴까?


원님, 바쁘세요? 저 질문 한 가지 있는데, 혹시 검색어 통계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괜찮아요 지수님. 여기 대시보드에서 키워드 쳐보시면 검색량 추이 나와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때문에 차가워 보였던 첫인상과는 달리 친절한 원님은 항상 링크까지 다 찾아서 보내주신다. 내가 관심도 없고 안 찾아봐서 그렇지 생각보다 회사에 이런저런 필요한 데이터들을 볼 수 있는 대시보드(다양한 정보를 보기 편리하게 모아놓은 화면으로 태블로에서 해당 기능을 제공)들이 많았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고객들이 우리 플랫폼에서 ‘나시’ ‘슬리브리스’를 검색한 횟수가 지난 주말부터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상향의 그래프를 보는 순간, 지금 뜨고 있는 아이템을 집중 노출해서 감소하고 있는 매출을 최대한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 갑자기 왜 이렇게 똑똑해졌지? - 누가 시킨 적도 없는 할인가 협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그 일을, 신이 나서 브랜드 담당자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제안했다.


4.

그렇지 않아도 저희도 이번 주 GMV 많이 빠질 것 같아서 추가로 행사할 것 없는지 찾아보고 있었어요. 먼저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후 미팅 후에 확정되면 CRM팀에 얘기해서 주말에 푸시(Push: 문자, 앱 알림 등으로 고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알림 기능)도 진행할게요.


마케팅팀 슬랙 채널에 아침에 분석하고 조사한 내용 – 나시 상품의 고객 검색량과 GMV 상승, 업체부담 할인 상품리스트 – 을 기반으로 주말특가 기획전을 제안했다. 긍정적인 피드백과 함께 오후에 바로 미팅을 진행하기로 했다.


패션팀 마케팅 담당자의 요청에 따라,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여성의류 브랜드 상품만으로는 타깃 고객이 한정적일 것으로 예상되어서 남성/공용의류 상품까지 함께 노출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빠르게 기획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떠올린 아이디어가 그날 오후부터 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렇게 우리 회사가 부지런하게 일하는 회사였나?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게을렀던 걸까?


이제 금요일 오전 10시에 기획전 오픈만 기다리면 된다.


+.

원님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원 선생님 혹시 한 가지만 더 알려주실 수 있나요?


ㅋㅋ 물론이죠!


매출 많이 나온 티셔츠 상품을 보려고 GMV 열을 내림차순 하니까 엑셀이 다운될 뻔했어요. 이렇게 보는 방법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지수님 피봇테이블 쓰시면 되는데 제가 10분쯤 뒤에 지수님 자리로 가서 알려드릴게요~


헉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다음 주에 점심 살게요 이따 오시면 날 잡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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