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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Sep 03. 2023

나의 시간은 누군가의

편지 #8

K에게,


슬픈 뉴스를 봤어.

수십 년 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던 사시 준비생이 노인의 나이에 이른 지금도 여전히 그 고시원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어.

불쌍하다는 댓글, 미련하다는 동정의 댓글이 많이 달려 있었어. 그런데 내가 느낀 건 동정이 아니었어. 동정은 내가 타인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이름이니까. 나의 시간이 그의 시간보다 더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떤 시간으로 삶을 채우든, 그게 삶의 가치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느낀 건 그 긴 시간을 홀로 걸어온 한 사람에 대한 존경과 애잔함이야. 그리고 깨달은 건 시간의 색깔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거야.

어떤 시간은 무지개색. 어떤 시간은 흰색 또는 검은색의 단색.


시간의 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순간들이 있어.

세월호 그리고 작년 핼러윈의 이태원.

작년 10월 29일을 선명히 기억해. 나는 그날 사고가 일어난 곳에서 멀지 않은 삼각지역 근처에서 친구와 저녁을 먹고 일찍 헤어진 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어.

취기가 적당히 오르니 창밖의 풍경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노래에 맞춰진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았어. 거리에는 귀여운 핼러윈 복장을 한 사람들이 넘쳐났고 나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 신이 났어. 집에 돌아온 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밤늦게까지 티비를 보는데 믿을 수 없는 뉴스 속보가 나왔어. 나는 그날 우연히 살아남았던 거야.

나는 여기 우연히. 너도 거기 우연히. 그도 거기 우연히 있는 거라면

나는 어떤 꿈을 가져야 할까. 무슨 일을 해야 우연한 불공평과 불공정에 의해 사랑할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앞에서 덜 부끄러워질 수 있을까.


토요일 아침 아홉 시.

내 집 내 주방에서 여유로이 드립 커피를 내리고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는 지금

누군가는 소중한 이를 잃은 상실감에 잠기고

누군가는 불공평한 세상을 한탄하고

누군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겠지.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이 어느 이에게는 너무 행복한 시간이어서 쏜쌀같이 지나가고 또 다른 이에게는 끔찍이 고통스러운 시간이어서 1초가 1분처럼 느껴지기도 해. 어느 날은 나의 시간이 누군가의 배경이 되고, 또 어느 날은 그들의 시간이 나의 배경이 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뉴스를 통해 전해 들을 때

가슴이 찡하고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시간이 곧 나의 시간임을 알아서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대.

저녁에는 남겨진 삶을 생각하는 게 좋아.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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