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생물학적 육신의 쇠락과 정신의 쇠퇴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빨리 나이 들고 싶었다. 미래가 안정적일 거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었다. 현재가 불안해서 외면하고 싶어서였다.
불교에서는 수만 번의 윤회를 통해 인간이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한 사람의 생애 주기도 우주의 생멸과 마찬가지로 흐름이 있다고 본다.
살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을 둔 적도,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육신의 힘이 쇠하고 근육이 줄어들고 허리를 펼 수도 손아귀를 꽉 쥘 수도 없는 내 몸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점점 건망증이 늘고, 기억도, 길도 잃게 되는 나의 정신 상태를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얼굴의 주름살은 전혀 두렵지가 않다. 문제는 늙어서도 지속될 불안과 외로움이다. 빅터 프랭클의 책을 다시 읽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뇌과학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직접 겪고 보았던 극한의 고통을 바탕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저서를 남겼다.
인간이 고통을 딛고 서는 데 필요한 건 'The Super Meaning', 즉 초의미이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Logotherapy 중 하나로 초의미를 고안한다.
Logo는 그리스어로 'meaning, 의미'라는 뜻으로 인간이 삶과 고통에 대한 어떤 의미를 찾게 함으로써 정신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초의미'란 '삶에 무조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를 인정하고 견디는 것이다.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굶주림과 고문, 노동, 결박된 자유 등 극한의 고통 속에서 인생의 의미나 목표를 찾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던 그는 신기한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최악의 위생과 굶주림으로 앙상한 기아 상태였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살아 남고, 어떤 사람은 무너졌던 것이다. 여기에서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생에 대한 놀라운 힘을 주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삶의 의미 없이는 건강할 수도, 살 수도 없다.' 이 말을 누가 했는 줄 아는가? 바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의미가 없는 절망은 고통이다. 한 개인의 절망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면 그는 반드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도 절망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크고 때에 따라서는 자살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왜 고통을 당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건강한 정신 상태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심리적 안정제가 되는데 고통을 줄이는 대신에 고통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삶의 갈등과 고통은 '어떤 의미로 규정짓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라는 입장은 정신분석학과는 대척되는 개념이다. 이런 관점은 내가 삶의 목표 앞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메타인지'의 맥락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이 생물학과 환경에 의해 이미 정해졌다고 정의하고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 그것을 기점으로 고통을 풀어 나간다. 하지만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는 모든 인간은 '의미'에 의해 달라지고 스스로 미래를 규정하여 개척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이런 관점은 개인심리학을 창안한 아들러 이론과도 상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을 자아, 초자아, 원초아로 구분하고, 인간은 이러한 부분들 간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본 것과 달리, 아들러는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여 나눌 수 없는(in-divide) 전인이라는 의미를 넣어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을 창안했다. 여기서 개인이란 내담자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따로 나눌 수 없는 전체성을 의미한다. <상담학 사전>
아들러 이론 중에서 가장 흥미롭지만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이것이었다. 바로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러의 입장은 '트라우마'란 고통을 겪은 인간이 스스로 트라우마를 고통의 원인이자 근원이라 규정지었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과거는 현재의 심리 상태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고통의 근원이라 규정지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고통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현재의 고통은 과거와는 전혀 인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남자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크게 다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높은 곳을 두려워한다는 것의 상관관계는 전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맥락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자이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인간이 감정과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해는 되지만 좀처럼 납득은 되지 않아 접어 두었던 오래전 아들러의 심리학은, 다시 든 빅터 프랭클의 책을 통해 다른 관점으로 다시 생각하게 했다. 아들러의 이론도, 빅터 프랭클의 책도 모두 처음이 아닌데 이제 와서야 완전하게 수용된 것도 내 인생의 경험 시간이 퇴적되었다는 의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