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중년, 특히 남성들에게 회사 생활에서 즐거운 시간 중 하나가 바로 회식이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동료들과 한잔하며 폼 잡고 각 잡을 수 있는 자리. 회식자리에서는 평소보다 더 당당하고, 더 여유롭게 자신의 위치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내가 던진 한마디에 직원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칠 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회식은 조직 문화의 연장선이며,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다. 공식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서열을 재확인하고 유대감을 다지는 장. 또한 직급이 올라갈수록 분위기를 주도하게 되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폼 나는’ 순간을 연출할 기회가 된다.
"자, 한 잔 할까?"라는 말 한마디에 모두가 술잔을 들고 분위기가 무르익는 그 순간, 평소와는 다른 위계질서가 작동한다. 회식 자리에서의 농담 한 마디가 유머러스한 ‘조직의 언어’로 자리 잡고, 때로는 후배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일종의 ‘직장 철학’이 된다.
하지만, 2025년 현재, 회식 문화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MZ세대는 ‘회식’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다르다. 이들에게 회식은 ‘즐겁지 않다면 굳이 할 필요 없는 것’이다.
과거의 회식이 ‘업무의 연장’이라면, MZ세대에게는 ‘선택적 참여의 시간’이다.
억지로 참석하는 분위기는 사라졌고, 대체로 낮술 몇 잔이나, 한두 시간 정도 가볍게 식사를 하는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술 없는 회식’도 보편화 되었고, 취미 기반의 모임(보드게임 카페, 방탈출, 스포츠 회식 등)이 회식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중년 세대가 "예전엔 말이야..."라고 추억을 꺼내려 하면, MZ세대는 "오늘 집 가서 넷플릭스 봐야 하는데요"라며 가볍게 거절한다. 이는 시대 변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과거(?), 회식이 한국 직장 문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내부자들>
한 기업의 권력자들이 모여 회식을 하는 장면은 술자리가 아니라 ‘정치’의 장이다.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한 잔의 술이 ‘충성’의 상징이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극한직업>
경찰들이 잠복근무 중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뜻밖의 회식을 즐기는 장면. ‘진짜 회식이란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자연스럽고 유쾌한 분위기의 회식자리를 보여준다.
<미생>
"이 과장님, 한 잔 받으세요!"라는 말이 반복되는 장면에서, 직장인의 애환과 함께 회식의 피로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회식은 여전히 중년 남성들에게 ‘폼 나는 자리’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시대가 변하면서 회식의 의미도 변한 것은 맞다. MZ세대는 업무 외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개인의 시간’과 ‘직장의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식은 ‘관계’의 자리다. 술잔을 들든, 보드게임을 하든, 함께하는 순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회식의 형태’가 아니라, ‘함께하는 즐거움’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는가이다.
이제는 폼을 잡기보다는, 각을 맞춰야 하는 시대다. 과거의 회식이 직급에 따른 질서의 자리였다면, 오늘날의 회식은 서로의 취향과 가치관을 맞춰 가는 과정이다.
변한 것은 회식의 모습이지, 함께 웃고 떠들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