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길에 앉아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소녀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어 표정을 알 수는 없다. 외롭게 앉아 있는 소녀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세상 어디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막대 꼬챙이로 땅에 낙서를 하고 있다.
소녀가 그리는 낙서는 아무 뜻도 형체도 없다. 낙서를 하고 있는 행동으로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외부에 대한 차단이나 경계심의 표현이다.
앉아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생각도 없어 보인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고개를 들 이유조차 없는 거 같다.
소녀는 세상에 무관심하고 사람들은 소녀에 무관심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모습이 왠지 측은하다. 세상을 등지고 외롭게 앉은 소녀를 보니 눈물이 난다.
언제 일어날까. 어떻게 하면 고개를 들까. 배는 고프지 않을까. 왜 바닥에서 의미 없는 낙서를 하고 있을까. 검은색 형체로 보이는 소녀의 존재는 색깔도 없고 소리도 없다.
존재는 하지만 방치된 어린 소녀 조각상 같다. 기다리는 부모 형제 친구도 없는 것일까. 볼수록 안타깝다. 저렇게 오래 사람을 방치하다니. 소녀는 혼자 놀고 있는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방치된 것이었다. 아무도 관심 없는 소녀를 보고 있으니 어릴 적 내 모습 같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소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세상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소녀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 소녀를 처음 만난 건 40대 중반에 3번째 명상을 시작했을 때다. 그날도 평소처럼 명상수업을 듣기 위해 퇴근 후 센터로 갔다. 그날 저녁 나는 정적인 명상과 동적인 명상을 번갈아 하고 있었다.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열심히 하던 그날 처음 나타난 소녀였다. 갑자기 소녀가 등장하자 눈을 감은 나도 놀랬다. 혼자 바닥에 앉은 소녀가 땅을 향해 낙서를 하는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내내 걸렸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우울해졌다.
귀가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렸다. 몸이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앉았다. 소녀가 앉은 모습 그대로 나도 바닥을 보고 정류장 구석에 앉았다. 낙서를 하고 싶었지만 꼬챙이도 없고 시멘트 바닥이라 검지손가락으로 손놀림만 했다. 고개 떨구고 바닥을 보며 앉으니 5분도 안 되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세라면 다리가 아파서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는데 왜 소녀는 그렇게 오래 앉아서 낙서만 하고 있었을까.
결국 다리에 쥐가 나서 일어났다. 잠시 앉았을 뿐인데 몸이 굳어 버릴 것만 같았다. 순간 소녀의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아픔이 느껴졌다.
세상을 등지고 사는 외로움, 혼자 감당해야 할 삶의 고통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정류장에서 그냥 울었다.
그 때 만난 소녀의 나이는 7살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나의 내면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이번에 한번 더 원고를 정리하면서 영성 가이드북을 읽고 또 읽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다. 자기사랑이 많이 필요한 소녀라는 것을. 그 때까지 소녀와 나를 동일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혼의 만남
영원한 생명
명상을 하면서 떠오른 이 두어절의 단어 2개를 여전히 되뇌이고 있다. 그렇다. 소녀의 나이는 내 영혼의 나이였고 소녀의 존재는 나의 모습이었다. 심하게 외롭고 우울한 소녀의 모습이 내 영혼의 실체였고 나의 내면아이였다.
소녀는 아직도 일어나고 싶지 않고 굳이 일어날 이유도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매일 명상을 하면서 그녀를 일으키려고 노력했고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명상을 할 때마다 내면아이를 떠올리고 나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다.
나를 위한 진짜 치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소녀를 떠올리면 명상조차 안 될 때도 많았다. 내 마음도 힘들었다. 내가 소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소녀를 일어나게 하는 건 내 자신의 몫이었다. 내가 다가가서 친절하게 말을 걸고 애정과 관심을 보여야 한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나의 육체적 나이는 50살이지만 정신은 7살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나도 영혼의 성장이 필요했다. 내 영혼이 성장해야 소녀가 깨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면아이 이야기는 책으로 읽었지만 나에게 이렇게 다시 나타날 줄이야. 내가 사랑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바로 그 소녀였다. 그동안 소녀를 너무 방치해 두었다. 아니 솔직히 관심조차 없었다.
내가 밖으로 시선을 돌려 희노애락을 즐기고 있을 때 소녀는 혼자 바닥에 낙서를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속의 고독을 알지만 수시로 밀려드는 외로움의 파도를 억지로 밀어낸 결과는 소녀를 무감각하게 했다.
그것이 고통의 시작이었다.
소녀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이었다.
소녀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었다. 나는 정신이 들었고 오늘도 소녀를 만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모두 만나야 할 내면아이가 있다. 여러분의 내면아이는 어떤 모습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