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만들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다양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나는 남들보다 더 주눅 들어 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도 대화의 주제가 나의 결핍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항상 가지고 있다.
가족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너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돼?" 등의 질문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혹시라도 그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대답하는 게 가장 좋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까, 그래도 포장된 말을 내뱉는 게 좋을까? 같은 두려운 질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대화에 온전히 집중을 하지 못한다. 대화의 흐름이 혹시라도 가족에 대한 내용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1차적으로 어떻게 서든 그 대화 주제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돌리지 못했다면 얼른 두려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고 어떤 대답을 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두려운 질문에 대한 대비 모드를 작동시킨다.
<돈에 대한 결핍>
돈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나는 뭐든지 돈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된다. 친구와 같이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을 때 약속 장소를 정할 때부터 어떤 식당이 괜찮을까? 를 고민할 때 1순위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가격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너무 가격에만 집중하면 식당의 퀄리티가 떨어질 수 있고, 이는 곧 '돈을 너무 아끼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너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금액대의 식당, 그러면서도 분위기는 좋은 식당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돈에 대한 결핍을 가진 사람은 바깥에 나가는 약속을 잘 잡지 않는 것 같다. 약속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줄어있는 통장 잔고와, 공허한 마음만이 나를 집어삼키기 때문에..
<옷에 대한 결핍>
옷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런 질문들에 예민하다. "이거 어제 입었던 옷이죠?", "맨날 같은 옷만 입는 것 같네." 나는 이런 질문들을 받을 때면 뭐라도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나는 분명 어제와 다른 옷을 입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같은 옷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항상 검정 옷을 입는 이유 때문이겠지.
친구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제는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더 이상 힘을 쓰지 않는다. 지금까지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좋았던 부분보다, 힘들고 지쳤던 마음이 더 컸던 탓이겠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오랜 기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나만의 근거 없는 확신도 한 몫한다.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만들고 있다.>
그렇다. 위 내용들은 모두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결핍, 그리고 그 결핍들로 인한 지금의 생활 방식이다. 각각의 결핍에 대한 결핍 행동을 대처하기도 힘들지만, 더욱 힘든 건 이 결핍 행동들이 융합된다는 점이다.
일적으로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을 때의 일이다. 어쩌다 보니 일이 끝나고 밖에서 따로 저녁을 먹거나, 카페에 가는 경우가 생겼다. 그럴 때 나는 내가 결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나를 '돈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까 봐, 모든 약속에서 내가 다 결제했다. 이것은 나의 돈에 대한 결핍과 친구에 대한 결핍이 융합되어 나타난 나의 행동이다. 하지만 이 행동으로 인해 나는 돈을 더 많이 쓰게 되었고, 그 사람과는 오래가지 않아 관계가 끝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내 인생이 더욱 비참해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여름이니까 반팔을 자주 입는데, 어떤 사람이 "이거 어제 입었던 옷 아니죠?"라는 말을 나에게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분명 많은 옷 중 가운데 하나를 입었을 뿐임에도 나 자신이 작아지고,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그래서 결국 집에 가는 길에 옷을 또 샀다. 이것은 옷에 대한 결핍과 친구에 대한 결핍이 융합된 결과였다. 그 사람과 잘 지내고 싶은데, 앞으로도 난 검정 옷을 입을 것이고, 그러면 계속 똑같은 옷만 입는 사람으로 남아질 수 있으니 나는 결국 옷을 샀다. 그 결과 나의 통장은 빈약해졌고, 검은색의 반팔은 옷장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나는 지금도 결핍 때문에 결핍 대비 행동을 실행하고, 그 행동들이 모여 결국 나는 또다시 결핍해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는 나머지, 정작 나 자신은 돌아보지 못한 것 같다. 아무리 돈을 써도, 아무리 옷을 사도 결핍의 구멍은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결핍의 구멍을 메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