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S/W 개발자의 조선시대 육아 병법

나와 덕순이만의 24시간 밀착 육아

by 덕순


지금 글을 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뼛속까지 개발자다.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하고,

대학교 때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조업 회사에 취직해서 펌웨어 S/W 개발 직군에 배정받았다.


그렇게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나는 쭈욱 개발자로 일다.


그리고 올 한 해도 지난해와 다를 바 없을 거라 믿었던 지난 2021년 1월,

나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 28세.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이른 나이도 아니지만,

요즘 추세로 보면 나는 젊은 축에 속하는 임산부였다.


아직은 20대의 체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본디 순한 아가를 만난 내 복인 건지,

나는 비교적 평화롭고 행복한 임신 기간을 보냈다.


임신 초기에 잠깐 입덧 때문에 고생했던 걸 빼면,

아기는 매 검진 때마다 주수에 맞게 쑥쑥 자랐고

나도 배가 점점 나올 뿐 별다른 트러블이 없었다.


덕분에 나 앞으로 다가올 출산과 육아를

미리 공부 여유가 있었다.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틈틈이 육아 관련 영상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는 육아 관련 책들을 읽었다.


책들의 주제는 다양했는데

주로 신생아 돌보기, 부모로서 아기를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육아 코칭 등이었다.


이토록 부지런하게 예습을 서둘렀던 이유는

'내가 미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실전 육아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몰랐다.




'아기는 S/W처럼 인풋과 아웃풋이 명확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

이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계는 0과 1의 세계였다.


주어진 입력 값에 따른 명확한 출력 값을 기대했고,

기대한 결과가 다르면 그것은 나의 논리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했다.


다시 돌아가 나의 논리를 수정하고,

주어진 입력값에 따른 명확한 출력 값을 기대했다.


결과는 단순했다.

맞거나, 틀리거나.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애매한 값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 명확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무려 7년 동안 개발자로 나름의 성과를 뽑아내며 살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육아라는 세계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마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캐릭터 하나를 키우는 것처럼,

아기의 초기 능력치와 주요 퀘스트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다.





한 번에 먹는 분유량은 10ml 곱하기 출생 일 수...


실내 온도는 24~25도, 습도는 50~60%로 맞출 것...


아기가 잠을 깊게 자도록 도와주는 수유 시간표...

오차는 30분 이내로 지킬 것...


아기가 유난히 보채고 힘들어하는 성장 급등 시기는 생후 5주, 8주, 12주...


노트 한 권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실전 육아에서 나는 이 지식들을 단 하나도 써먹지 못했다.


아기는 이런 수학 공식 같은 방식으로는

다룰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70억 인구의 얼굴이 70억 가지인 듯

아기는 저마다 성격과 기질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 따라,

그리고 매 순간의 컨디션에 따라 맞는 육아의 방식이 달랐다.


그래서 나는 24시간 내내 덕순이와 붙어있으면서

자연스레 덕순이의 성향과 기질에 맞는 방식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 방식들은 요즘 육아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제목을 붙이자면

'조선시대 육아 병법' 같은 것이었다.




덕순이가 배고파하면 배부를 때까지 젖을 수시로 물릴 것.
덕순이가 혼자 자기 힘들어하면 잠이 들 때까지 안아주고 안심시켜 줄 것.
덕순이와 직접 몸으로 놀아줄 것.

아기는 저마다, 날마다,
몸과 마음이 크는 시기가 다르므로
덕순이가 유난히 보채고 힘들어할 때 그 신호를 알아차리고 더 잘 안아 달래줄 것.


이렇게 나는 내 아기 덕순이

마치 조선 시대를 살고 있는 것 마냥, 행복하고 고생스러운 육아를 시작했다.


덕순이가 배고플 때 배불러할 때까지 젖을 물리고,

유난히 칭얼거릴 때에도 젖을 물려 진정시키고,

일회용 기저귀 대신 천 기저귀를 채우고,

잠투정이 심해져서 울고 보채면

등에 업고 자장자장 노래를 불러주었다.


밤에는 덕순이의 잠꼬대 같은 작은 끙끙거림에도 눈이 번쩍 떠져서

혹시라도 불편한 게 있는지 살펴보았다.


현란한 장난감 대신,

엄마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엄마의 엄지 손가락을 꽉 쥐고 율동을 했고

엄마의 눈을 쳐다보고 함께 옹알이를 주고받았다.




덕순이가 어떤 성격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기분이 좋고 나쁜지를 관찰하고 알아가며 맞춰가다 보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과 정 반대의 방식으로 육아를 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유난 맞은 육아를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그리고 나보다 행복하게 자랐으면...'

하고 바랬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신이 겪었던 결핍을 자식에게 채우려는 본능이 있다고 했던가.


나는 우리네 엄마, 아빠에게 부족할 것 없는 보살핌과 지원을 받았지만

늘 목말라했던 결핍이 있었다.


'내가 어떤 성격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언제 기분이 좋고 나쁜지 알아줬더라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겪은 우리네 엄마 아빠 세대는

자식과 함께 살아가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외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내 부모님은 공부를 위해서라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여느 90년대생 아이들에 비해 부족할 것 없는

아니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살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 시절에

내 아이는 어떤 성격일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할까, 언제 기분이 좋고 나쁠까,

고민하는 부모는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들보다 더 예민하고 복잡했던 어릴 적의 나를 회상하면서


'그때 나를 좀 더 알아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늘 담아두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절히 원했지만

이해받지 못했던 것들을 되짚어가며,

덕순이에게는 그것들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남들보다는 조금 더 고생스러운,

하지만 순이를 많이 관찰하고 알아가는

행복한 24시간 밀착 육아를 하고 있다.


하루 24시간 중 덕순이가 등에 업혀 자는 낮잠 시간은 유일한 나만의 시간이다.

나는 이 짧은 시간에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최선을 다해 글을 쓴다.


나의 행복한 '조선시대 육아 병법'과

이를 통해 내가 덕순이에게 주고 싶은 사랑과 가르침에 대해

기나긴 이야기를 풀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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