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결혼에 관한 낭만적인 생각 #11
오래전부터 연애와 결혼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최근 10편 정도 관련된 글을 쓰고 잠시 멈췄었다. 정신의 깊이가 깊은 그녀를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랬더니 그녀를 생각하면서 마법처럼 단숨에 글을 쓸 수 있었다. 다시금 그 시대를 기대하면서 오늘부터는 조금 더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보려고 한다. 새로운 접근을 하겠지만 다소 철학적이고 공동체적인 따스한 글들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굳이 학문적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말한 '영감이 올 때 쓰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싶다. 이상하게 브런치를 켜 놓고 앉으면 어떤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절대로 쓸 수가 없어서 한 참을 서랍장에 넣어 놨다가 쓰는 글들이 많다. 이번에도 그런 주제였다. 결혼과 연애에 관한 생각을 과연 내가 쓰는 게 맞나라는 생각에서부터 정신이 깊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절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영감이 불어 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10년을 생각하면서 그녀에게서 어떤 인간됨을 느꼈던 것 같다.
여전히 둘 사이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각자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오늘 더 자세히 보겠지만 '욕망'을 넘어서서 함께 걸어갈 수 있을 때, 함께 비천해질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굳이 연인이 아니더라도 어떤 모습으로든 만나게 되겠지. 그게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다. 오히려 사회가 주는 정체성으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하기보다는 우리가 만든 관계로 사회에 또 다른 상징을 만들어 가면 될테니깐. 오늘은 돌볼 줄 아는 인간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철학과 생각들을 불러올 참이다. 최근 추천받은 '돌봄과 인권'이라는 책도 살펴보고, 찰스테일러의 '사회적 상상'이라는 책도 살펴본다. 20세기 합리성이 지배하는 근대가 만든 독특한 인간형인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의 전형, '독립적 인간'에 대한 묘사와 함께 반대로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살 수 있었던 이유인 '돌볼줄 아는 인간'을 대비시켜 볼 심산이다.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정신의 차원이 다른 그녀가 단순히 똑똑하고 지혜로워서 혹은 아름다워서 계속 잊지 못하는게 아니다.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에서 '돌봄'이 자연스럽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주 투쟁적이고 그리고 필사적으로 주변을 보살피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려서이다. 이러한 생각을, 감정을 어딘가에 적어 놓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이 글을 시작했다. 아주 오랜 후에 언젠가 어색하지 않은 미소로 만날 수 있을 때 작은 선물처럼 이 글을 전해주면 좋겠다. 국면을 전환해서 어찌되었든 그러한 촉발을 통해서 쓰는 글 치고는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글이다. 현재의 다양한 가정의 문제와 사회적 난제로 자리잡은 결혼과 연애의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인사이트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생각이라 함음 정신과 몸을 모두 같이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그럼 한번 단숨에 써 내려가 보자.
https://brunch.co.kr/brunchbook/minnationlove
세계가 일정한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면 이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불렀다. 패러다임은 생각의 흐름을 비슷하게 만드는 일종의 바운더리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요한하이징가가 쓴 '중세의 가을'이 중세에 완전 몰입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순간 중세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면서 현대성이라고 하는 '논리와 합리성'의 세계가 올 것은 예감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라고도 하고 근대라고도 하는 moderninty를 열어 재낀 것은 과학이었다. 과학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방법론은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끌어 내어서 뜯어내고 자신들의 방법론으로 하나하나 덧 대어 갔다. 처음에는 자연에 대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분할해 가면서 자신들이 이해한만큼 기록하고 기록한만큼 잘라내어서 소위말하는 '개발'을 진행했다. 인간이 대상화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규격화하고 시각화하면서 자연을 이해한 만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세시대까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은 일정한 '장소'안에서 신성함이 거하는 영적인 존재들의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과학은 일정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 그리고 천사와 악마의 존재는 '미신과 주술'로 정의하였다. 그 범주에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타부시되고 비합리적인 것이 되어서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에서부터 이원론으로 떼어낸 존재들을 칸트에 가서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합리성으로 이성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장소에서 공간으로의 이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간'이라고 하는 특정한 상상의 공간을 균이하게 분할하고 그 분할한 거름망으로 현실을 정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는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물, 자연과 다양한 사회조직 그리고 시장과 교회의 모습들이 공간 속에 들어가서는 하나하나 분해되고 잘라져서 그 의미를 잃어 버리게 된다. 그리고 '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조합되어 장소로 내려오게 되는데, 내려올 때 규칙은 지금까지 정리된 공리, 실험에서 빈번하게 도출된 이론으로만 가능했다. 소위말하는 실증주의라는 것이 증거를 기반으로 공간의 요소를 장소로 끌어내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러한 합리성을 무서워하거나 무시하거나 했지만, 곧 이렇게 위에서 내려온 합리성의 결과들이 도로도 만들고 철도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게 되자 인정하게 되었다. 마치 우리가 오늘날 인공지능을 하나의 존재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하운동 안에서 해석되고 이해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생각하는 방식이나 우주를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신을 대하는 방식 모두가 논리성과 합리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이러한 합리성이 구조화되고 현실화되면서 만들어낸 인간론과 자연론, 사회론과 국가론의 정의와 범주이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살아가는 가운데 만나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독립적인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경로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의 시작이었지만 어느나라나 전염병처럼 이러한 생각의 패러다임을 겪게 되어 있었다. 어떤 개념은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면서 배회하는 유령과 같으니까. 합리성이 만들어낸 관점은 자기자신을 합리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장소'에서 갖게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공간'에서 만들어진 정체성으로 자신을 정의했다. 그러니깐 아무것도 없는 맥락에서 갑짜기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된 것이다. 무에서 만들어진 유적인 존재들은 언제나 공간 안에서 가지고 온 규정과 기준, 합리성과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을 설명했다. 합리성이라는 것이 사실 누군가 정하기 나름인데, 우리가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정의내렸고 그것을 사람들이 더 이상 그게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천재가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러니 합리성이라는 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누군가의 '공간'에서 탄생하여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을 우리는 근대 혹은 현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양화는 악화를 구축한다처럼 한번 길이 만들어지면 '시간 위의 존재인 인간'은 그 길을 따라서 계속 움직인다. 누군가 처음 제안한 길은 대부분 합리성이 기반이 된 기술의 형태로 드러났다. 처음에는 신기했고, 사용해보니 편리했고, 나중에는 없어서는 안될 기술이 제품이 되었고, 상품이 되었고, 제도가 되었고, 법이 되었다. 사회적 시간이 점차 흘러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기술 덕분에 이제는 누구를 변화시키거나 영향력을 미치지 않아도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대화를 나누고 예상되는 선택을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공간 속에서 만들어 낸 합리성의 작품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자신의 공간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건 신기한 경험인데 한번 생각해보자.
달리는 차에 타면 100km로 달릴 수 있는데 내리면 5km를 달리는 것도 힘들다. 100km로 달리는 버스에 모기가 타게 되면 평소 0.1km로 날아다니는 모기가 100km로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속도를 극복한 인간은 점점 더 다양한 것들을 공간에서 꺼내왔다. 그것을 보이는 제품으로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이 다시 갖혀 버렸다.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 하는 사람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 하는 사람의 하루의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 개인의 공간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무리 차가 막히더라도 도착한다는 믿음으로 운전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이 계속 쌓이면 몸이 학습한 독립적인 속도로 움직이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턴을 하는 운전대가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서 교통사고가 나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자신의 몸무게보다 몇 배는 더 나아가는 철덩어리들을 자신의 몸과 같이 여겨야 한다. 머릿속의 공간이 차량이라는 작은 공간으로 실제화된다.
자동차만 그랬을까? 스마트폰으로 연결되는 무한의 공간은 또 어떤가? 온라인 게임이든 콘솔게임이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학습하고 있는가? 모두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독립적인 에이전트들을 가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간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누구라도 합리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설사 가지고 태어나지 않더라도 교육을 통해서 합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합리성을 태동시킨 과학의 방법론을 이미 사회와 인간의 내면까지 가져온지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존 롤스와 버트란트 러셀과 같이 영국과 미국의 실용주의와 실증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전모다. 그러니깐 individuals라고 할 수 있는 '이미 쪼개져서 자신의 것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게 분할된 정체성은 각각에게 투표권과 시민권을 쥐어주었고 사회는 경쟁이며, 누군가와의 다툼은 필연적이라고 말하게 만들었다. 연고가 없는 무연고적 자아는 원래부터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정체성이었으며, 누군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돕고, 누군가의 부족함을 대신 채워준다는 것은 독립적인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들이 만든 혹은 부여한 공간에서 자신이 책임지지 못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자신만의 공간에 갖힌 독립적인 인간은 추후에 더 살펴보겠지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수 많은 문제를 양상하기도 하고 그 문제들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사회에 나오는 개인주의나 독립적인 인간을 찬양하는 책들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더 해보자. 그럼 돌볼 줄 아는 인간은 도대체 왜 탄생하게 되는 걸까? 아니 그게 가능은 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현대성 담론에서 가져온 독립적인 인간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근간으로 하는 현대성의 하나의 방식인데, 이것이 삶과 연결되면서 기가막히게 인간론과 정체성을 부여허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게 된다. 굳이 마르크스를 대동하지 않더라도, 자본은 '교환'이 특성이기 때문에 교환을 하려면 하나의 '개체'로써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했다. 노동이 1:1가치로 교환이되어야 하니 시간당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성의 옷을 입었고, 인간의 의미도 사회 속에서 어떤 집, 어떤 차, 어떤 소유를 가졌는지에 따라서 달라졌다. 그러니깐 합리성이 가장 드러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독립채산체로서 사회에서 원하는 노동력을 가진 인간으로 자라나도록 학습시키며, 잉여가치가 점점 쌓여갈 수록 노동은 집어 치우고 소유했던 것들이 얼마나 교환가능한가로 사람들을 규정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산다는 것은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신의 몫을 해 내는 사람을 뜻하며, 그렇게 해내면 해낼 수록 그 사람에게는 자유가 선물로 주어 졌다. 그 자유는 물론 '소비'의 자유이지만 자본주의로 전세계에 맥도날드드를 깔았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자유가 되었다. 종교와 정치, 문화와 교육까지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독립적인 인간이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러니 돌보는 인간을 생각하는 나양한 인간들에게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길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념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러다가 이혼하고 자녀들의 양육문제로 법정다툼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돌보는 인간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돌볼줄 아는 인간의 탄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잠시 생각해보자. 인간이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해보자. 그러면 이제막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온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적어도 10년정도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데 말이다. 인간은 그 때 욕망을 배우고 오이디푸스컴플렉스와 같은 성적충동의 왜곡을 겪는다고 한들 먼저는 누군가 돌보아주어야만 욕망도 추구할 수 있고, 학교도 다닐 수 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의지로 자유를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이미 완성된 것처럼 생각하는 '합리성'의 중심에는 자연스러운 엘리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어떤 형태로든 성장한 인간들이 '인류전체를 바라보기'를 시전하여서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라고 명명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어른들은 어른이 되었을까?
벌써 10년전 이야기이지만, 철학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가장 귀중한 강의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강의였다. 크리스테바는 '경계'에 서 있다고 할 만큼 페미니스트면서도 기독교 철학자이기도 하다. 프랑스철학의 특성상 누구와 어떤 배치로 서 있는냐에 따라서 존재론이 달라지기 때문에 크리스테바를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수업을 들으면서 크리스테바가 이야기하는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 전까지 프로이트와 라캉을 공부하면서 들었던 고민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었다. 크리스테바는 말한다. 인간은 '욕망'으로 살지 않고 '사랑'으로 산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돌봄을 받고 성장하게 된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묻는다.
프로이트씨~ 당신은 아이를 낳아본 적이 있나요?
당연히 없겠지. 라캉역시도 없을 것이다. 남자들의 철학은 경험적으로 한계를 가진다. 굳이 여기서 남자 여자를 나누어서 패미니즘 논쟁에 껴 들고 싶지는 않지만 생명학적으로 여성은 아이를 잉태하면 자신의 몸 속에 다른 생명이 자라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경험을 하는 10달동안 여성이 '엄마'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굳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젠더라는 경험을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낳고 기른다는 의미에서 엄마이다. 그런데 어떤 문명이든, 어떤 인류의 공동체이든 한가지의 독특한 특성이 보여지는데 그것은 부모들의 '비천해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인생의 중심에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놓고서는 자신은 중심에서 멀어져서 계속 비천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어느정도 돌봄을 받고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는 계속해서 비천해진다.
사랑은 비천함이다. 나를 중심에 놓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게 본성이든 학습이든 인간이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완성형으로 태어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가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다. 크리스테바의 이야기로 하면 '누군가의 비천함'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함으로써 비천해지지만, 그에 더불에서 샤르트르가 말하는 '즉자존재'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대자존재'가 된다. 더욱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는 그 아이들을 자신과 같이 이성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우한다는 의미에서 '대타존재'가 되어 간다. 그러니깐 누군가를 사랑해서 비천해진 사람만이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비천함이라는 단어를 꺼내 놓고 부모들의 성을 지운다.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자녀들을 자신의 중심으로 놓고 같이 뒤로 물러서는 존재! 그게 바로 부모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릴 때 받은 사랑으로 충분히 주체가 된다.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고서는 이제 서서히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천해질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한발짝 물러서서 양보하고,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누군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그러한 헌신과 섬김을 선택하게 된다. 누간가의 비천함 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점점 자신이 성장해온 돌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비로소 즉자존재에서 대자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서는 어느순간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신과 비슷한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보았을 때 '대타존재'로서 연애를 생각하고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서투른 연애나 무모한 결혼은 돌이켜 보면 비천해지지 못한 사람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천함을 충분히 받고 자라지 못한 사람들의 서투른 연애는 언제나 그 자녀들이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어릴 적의 상처들의 대부분은 부모들의 미숙한 때문인데, 그 부모들이 어릴 적에는 더 미숙한 부모들에게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사회를 들여다 보면 1950년대를 지나서 태어난 베이비부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비천해지는 것은 커년 먹고 살기도 바빴던 시기에 돌봄을 받지 못하고 형제들에 의해서 자라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 성장해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런 베이비부머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X세대로 자라게 되는데 이 때는 '돌봄'이나 '비천함'보다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사회가 1950년대 이후 1960년대 경제적 인간을 지향하는 합리성과 현대성의 사회적 목표가 만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보다는 빼앗고 경쟁하고 이기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인생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자신이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친구를 만나던지 애인을 만나던지 간에 자기 스스로 해야 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이렇게 조금은 평평하게 만들어서 이해해보면 80년대 생은 MZ의 특성과 X세대의 특성을 어느정도씩 가지고 있다. 그러니 X세대의 자녀로 태어난 90년대 생들이 사회에 나오는 2010년도가 넘어가면서는 아예 다른 인류가 등장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간혹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들만 비천해지기를 선택하지만 그도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정보회사는 어쩌면 이런 시대적 흐름을 잘 읽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적인 인간에게서 태어나서 독립적인 인간으로 길러진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도 많은 문제들을 만난다. 교육이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은 가정이 문제다. 이미 부모님이 독립적인 인간이라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잘 주지 않는다. 아니 사랑이라고 해 놓고 비천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리인으로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만든다. 권위적이 되거나 무관심한 자유방임주의적인 부모가 되거나. 그러나 X세대 부모 역시 MZ세대에게 '비천해지는 방법'을 몸소 실천한 적이 별로 없다. 사회에서는 그런 '비천해짐'은 왕따가 되기 딱 좋은 자질이며, 경쟁은 야만이라도 이기면 장땡이라는 '일등만 기억하는 사회'가 가만 둘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을. 그래서 '돌볼줄 아는 인간'은 사회 속에서 아무 희미하게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다가 사라진다.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세대간 전해지는 가치와 문화, 정체성과 삶의 태도는 생각보다 영향을 많이 미친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1000일이 될 때까 텅 비어 있다가 모든 것을 빨아 들이고 주워 담는다. 신생아부터 해서 3살까지 아이들의 눈을 보면 항상 무언가를 배우고 있고 학습하고 있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배우고 익히고 기억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자리로 움직이고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을 구부릴 줄 알게 되는 때부터는 자신이 익혔던 것들을 실제로 그런지 실험해본다. 경험하고 체험하는 과정에서 지구라는 환경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감을 잡는다. 이 기간까지 부모는 돌볼줄 아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주면서 한 시도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귀엽기도 하지만 반대로 미워서 죽을 만큼 자기 멋대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멘토링'을 할 때처럼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기다려주고, 늦게 오면 무슨 일 있는게 아닌가 걱정한다. 비천해진 사람만이 사랑을 안다. 안타깝게도 어릴 적의 상처들의 대부분은 돌봄과 비천해짐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부족으로 받은 것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시대를 반영한다.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를 넘어서 자신만의 주관으로 살아가야 하는 탈현대 시대에 인간관은 당연히 자신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누구에게도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미덕을 '시민권'이라고 불렀다. 이런 부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순간 그러한 시대정신으로서의 인간론을 스스로 객관화 시킬 수 있다면 진정한 자신의 고유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애와 결혼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는 우리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통과의례들이 우리의 세계관을 지배한다. 보편교육 12년을 받고 나면 국가가 원하는 인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다가 대학에 가면 시장에 맞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다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경제인구를 생산하고 부모님과 주변의 시선에 응답해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을 갖게 된다.
살아가면서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시켜서 볼 줄 아는 능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렇게 보고 난 뒤에 다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과 어떤 삶을 공유할 것이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과정을 반복적으로 성찰한 사람은 정신의 깊이가 깊어질 수 밖에 없다. 이건 설명을 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녀를 만나기까지는 몰랐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내가 어떻게 살고 있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신기하게도. 독립적인 인간은 시대상이지만 돌볼 줄 아는 인간은 인류의 영원한 인간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계속해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돌볼 줄 아는 인간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시대가 주는 방식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오히려 그걸 포용하거 더 나아간다. 더 멀리보고 더 깊게 본다.
문제는 독립적인 인간과 돌볼 줄 아는 인간이 만났을 때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행동한다. 연애를 할 때는 '이기적인 모습'을 감추려고 자유를 빙자한 가스라이팅을 하기 일쑤이다. 다소 비판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정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 범주에서 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것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나를 비롯해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이 마음을 불안정하게 하지 않고 삶의 불협화음을 내지 않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깐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등장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러면 합리성의 측면에서 합리적인 영역의 경계를 자기자신을 넘어서 자신이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확장한다.
그러니깐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자신의 배우자나 연인에게까지 확장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배우자나 연인까지 확장하게 되면 '지배와 통제'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예측가능하고 이해가능한 수준에서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지배의 방식을 거칠게 그 과정을 만들면 가스라이팅이 되고, 부드럽게 만들면 관계 속에서 일종의 역할과 약속을 합의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전혀 이상할게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점점 예측가능한 범위가 늘어날 수록 둘 사이의 무료함은 더욱 늘어나게 되고, 삶의 어느순간에 삐끗하는 동요가 생겨날 때 자기 스스로 만든 규칙과 합리적 영역을 벗어나는 일탈이 발생한다. 바람피우게 되거나 관계가 없는 부부가 되거나. 같이 있지만 소통하지 않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립적인 인간에게
축복과 같이 돌볼 줄 아는 인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기반으로 더 생각해주고 이해주고, 사랑해서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것. 어쩌면 인간은 이런 바탕 위에서 자라 온 것이니깐 독립적인 인간은 서서히 자신도 돌봄을 받고 아이들과 같이 타인을 향해서 발돋움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주 간혹 생긴다. 돌봄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또 다른 사람의 도움에 진심으로 반응하게 된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기독교는 항상 이런 스텐스였다. 희생하고 기다리고 참아주고 사랑하고. 그런데 가정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연애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아주 간혹 가다가 그렇게 정신의 깊이와 돌봄의 깊이가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누구나 그런 사람을 만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선택할 수는 있다. 물론 자신이 배웠던 것을 돌이켜서 새롭게 배우고 경험해야 하지만.
이러한 관계 속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점점 자신의 태도와 습관을 배우면서 성장한다. 독립적으로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얼릴적부터 훈련시키는 부모님이 있는가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살면서 학교에서 힘든 친구들에게 다가가서 손 내밀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울 수도 있다. 아이들은 그러한 부모의 이야기를 부모의 삶에서 보고 배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날마다 독립적인 방식을 혹은 돌봄의 태도를 쌓으면서 점점 자신이 되어 간다. 삶의 중심에서 다른 이들을 맞이할 수 있는 만큼의 뒤로 물러섬, 비천해짐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 갈 수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겸손함을 자신의 삶 속으로 가져온다. 독립적인 인간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와 사회가 그렇게 학습시키고 그렇게 구조를 만들었고, 그렇게 사람들의 관계를 셋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시점이 지나서 합리성이 구닥다리가 되고, 인간의 관계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정된다면 자신이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배워서 터득한 삶의 방식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미래를 준비할 수 없을까? 인간의 돌봄의 역사는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계속해서 있었고, 독립적인 인간의 모습은 고작 200년 남짓이라고 한다면. 더 길로 오래된 삶의 패턴과 인간존재의 향연이 다시 도래할 것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그런 아이들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점을 남겨보자. 아직 답은 없지만 그래도 함께 고민해야할 지점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간의 돌봄의 역사는 인류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였다. 이런 눈으로 연애를 생각 해 보고 결혼을 그려 본다면 어느정도는 달라진 시점에서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대와 상황 속에서 경제적 자유만을 가장 우선시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한 시점이 되다가 어느순간 사리지게 될 것이고, 계속과 빠른 판단을 최고의 선으로 여겼던 사람들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면. 무엇이 남을까?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여기서 '살깣의 신비'를 말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만지면서 놀이하는 것 말이다.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와서 하나의 개체가 되면 자신을 어느순간 하나의 독립된 개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여전히 연결을 갈망하고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연결이 스스로 있으면서도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길 때, 미래를 정해놓지 않고 열려진 신비로 놓아둔다. 그 가장 첫번째 경험이 바로 '살깣'이다. 생각과 기억 이전에, 감각으로 정리되기 이전에 이미 살갗을 부둥켜 않고 비비고 만지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과 함께 다른 사람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연인들이 계속해서 서로를 만지고 키스하고 살을 섞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신비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살깣의 신비는 기억한다고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만지고 확인해야 하는 신비이다. 휘발되는 감정처럼 살깣을 나누는 사이는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축인다.
그러니깐 에로스만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감정과 정신으로 나누었던 합리성의 시대의 구분이 어느순간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람들과 함께 만나서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대화를 하고 눈을 쳐다보면서 정서적 교감을 하는 것.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거기에 연인을 넘어 부부관계는 정서적 교감 만이 아니라 살의 교감까지 넘어간다. 그게 특별한 점이다. 요즘시대에 부수적이거나 선택으로 되고 있는 성적인 행위들은 합리성의 기반한 자유의지의 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몸의 중요성 더 나아가 몸이 정신과 나눠질 수 없다는 것을 잊어 먹고는 자신의 자유로 선택한 것들을 자신의 몸과는 다르게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자유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몸의 모든 공간에 펼쳐져 있는 마음으로 아는 것과 같다. 정신은 몸과 하나다. 그러니 몸이 하나가 되면 정신이 하나가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이다. 합리성은 이것을 다시 나누고 쪼개서 다른 방식으로 매친한다. 그러니 몸은 그렇게 안되는데 정신은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인간은 원래부터 나눠서 생각할 수 없고, 항상 종합으로 살아왔다. 나누려고 해서 집중한다는 것은 그 집중을 위해서 온 몸과 정신이 하나의 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분리된 것은 없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살깣으로 만나는 사람들, 연인과 부부 사이에서 단순한 에로스적인 본능만 발현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전체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나누는 순간 핵분열이 일어나듯 관계가 깨어져 버린다. 파괴되어 버린다.
살깣을 서로 부디끼면서도 항상 다시 만지고 싶은 존재는 둘 중에 하나이다. 연인관계 이거나 혹은 부모와 자녀의 완계 이거나. 연인관계는 언제나 미끄러짐의 연속이다. 만지고 또 잊어먹고 만지고. 나와 다른 존재에게 사랑을 느끼면서 그 사람을 만지면 더 만지고 싶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런데 또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다. 이 미묘함, 이 정의내릴 수 없음, 이러한 감각과 아쉬움의 관계가 결국 관계를 유지한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지만, 내가 아니여도 되고 아니여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신비로움을 공유하는 관계이다. 이렇게 서로가 계속해서 타자를 확인하면서도 계속하는 애무의 연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아이들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 미스테리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제 3의 존재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계속 만지면서 돌보는 부모님의 손에는 어느덧 자신들의 인생의 중심을 밀어낸 사랑이 닮겨 있다. 아이들은 그 손의 감각을 몸과 정신 모두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돌봄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 아이들은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누군가를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삶의 감각을 얻게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요즘들어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연애와 결혼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라 계몽주의 이후에 파괴된 인간성의 근원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연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인류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과학과 경제적인 방식의 세계관이 바꿔 놓은 세계를 보게 되었다. 나 역시도 한국적 상황에서 합리성이 지배하는 현대가 만든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세대간에 전수되는 사랑과 살깣의 신비함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돌아보게 되었다. 젠더 이슈를 좀 멀리하고 한국사회에서 남자로 자라서 여성을 결혼상대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남자와 여자를 결혼을 전제로 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가정'의 중요함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은 '경제인구의 생산'이라는 합리성의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 사랑을 나누는 관계, 더 나아가 살깣을 서로 비비면서 온몸과 온정신으로 사랑하는 관계의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 미스테리, 그 신비함 속에서 탄생할 미래의 새로운 존재에 대한 희망도 그려본다. 미래와 연결된 아이들을 생각할 때 나는 나이가 많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과연 돌볼 줄 아는 사람일까? 나의 마음 속에 사랑이 넘쳐나고 있을까? 누군가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 소유하려 들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독립적인 인간을 유지하려 들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돌보고 이해하고 관심과 배려를 실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될까? 이런 고민으로 이번 연말을 보냈다. 아직도 정신의 깊이가 깊은 그녀를 생각하지만, 그 역시도 어떤 목적과 의도의 관계 이전에 돌볼 줄 아는 인간으로 만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다. 그 다음은 그 때 생각해도 좋을 만큼. 돌볼 줄 아는 인간을 기다리며 나 역시도 돌봄을 실천하는 인간이 되길.
https://brunch.co.kr/@minnation/3203
https://brunch.co.kr/@minnation/758
https://brunch.co.kr/@minnation/736
https://brunch.co.kr/@minnation/777
https://brunch.co.kr/@minnation/3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