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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Apr 01. 2016

숨쉰다는 것은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벽> 장 폴 샤르트르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언제나 뛰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벽이 나타나 나의 길을 막을 때도 있다. 작은 벽은 간단히 넘어갈 수 있지만, 그 벽이 점점 커질수록 벽을 뛰어 넘기가 힘들어진다. 벽에서 막힌다는 것은 그 벽이 나의 한계라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샤르트르의 소설 <벽>에 나오는 사람들, 톰, 꼬마 아이 후안 그리고 주인공인 파블로 이들은 스패인 내전 당시 수용소에 잡혀온 사형수들이다. 샤르트르는 사형 당하기 전의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안개 같이 흐릿한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각각의 벽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


첫번째 벽,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게 하는 벽


사형수들이 첫번째로 마주하는 벽은 사형수들이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형수 중에 한명은 자신이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도, 춥다고 체조를 하면서 자신의 신체에 온도를 높이려고 한다. 추위를 느낀 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즉, 이때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몸으로 느낀 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자신의 정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시험을 보러 갈 때, 시험 때만 유독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시험장을 갈 때는 날씨가 어떤지, 내가 손을 떨고 있는지 이런 행동들을 감지 못한다. 하지만, 시험이라는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시험장을 나올 때는, 그때 부터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가 느껴진다. 이처럼, <벽>에 나온 사형수들이 처음 느낀 벽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몰지각한 상태이다.


두번째 벽, 육체가 통제가 되지 않는 벽


날씨가 춥다고 체조를 하던 사형수들도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멘탈이 나가버린다.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이 오줌을 지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때부터 그들의 정신과 신체가 분리가 되어 버린다. 여기서 형무소의 진정한 실체가 나온다. 사형수의 고통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바로, 죽음을 생각하고 그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의 고통이다. 계속, 시험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시험 보는 것이 마치 죽음과도 같다. 솔직히, 시험 공부에서도 제일 힘이 들 때는 바로 전날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내일 시험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험 보기 1분 직전까지 사람을 긴장을 하지만 시험을 보는 순간 그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괴로운 것은 죽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형무소 속에서 사형수의 괴로움은 바로 죽음을 기다리며 매일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사형수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몸은 살아있는 것이지만, 정신은 이미 죽어 있는 기이한 형상을 보인다.


세번째 벽, 물리적인 벽


소설이 진행되면서 사형수 세 명은 벽을 뒤로 하고 서있게 된다. 그들은 뒤로 벽을 밀지만, 벽이 밀리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물리적인 벽은 인간이 한계 상황에 저항을 하지만, 벽에 대한 저항은 하면 할 수록,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벽이다. 슬픈 이야기지만, 자신의 능력에 따라 넘을 수 있는 벽이 있고 평생 못 넘을 수 있는 벽도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인간의 능력이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역량의 차이지 모두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한계 상황에 부딛히게 된다. 한계의 벽 속에서 인간은 존재에 대한 몸부림을 치지만 그 몸부림을 칠 수록 그 벽 앞에서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일 수 있다. 이 부조리한 벽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사형수처럼 죽음을 기다리거나, 카뮈가 말한 시지프스처럼 자신의 고통을 자신이 주인되어 이겨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네번째 벽, 죽을 수 없는 벽


물리적 벽 앞에서 후안과 톰은 사형을 당한다. 하지만 파블로 홀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즉, 사형수가 시간이 되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데, 죽음으로도 가지 못하는 벽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파블로의 이런 벽은 파블로를 괴롭게 만든다.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이미 정신은 죽어있었고, 죽음을 기다리는 괴로움 속에서 살았는데, 죽음이 앞에 다가오니 죽음을 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동료들의 죽음을 보면서,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얻게 되었다. 이제, 파블로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신은 죽어있고, 신체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은 공간적으로 갇혀 있으며, 죽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바로 자신의 선택할 의지 뿐이다.


다섯번째 벽,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벽


마지막은, 운명의 벽이다. 이 소설에서, 후안과 톰이 사형을 당하고, 파블로는 살게 되는데, 수용소의 장교가 파블로에게 제안을 하나 한다. 만약, 네가 너의 대장의 은신처를 대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파블로는 비록, 자신이 모든 벽에 부딛혀서 무기력했지만, 죽음은 자신이 직접 선택하겠다는 생각에, 거짓 정보를 흘린다. 그는 장교와 군인들이 헛탕칠 것에 대해 즐거워 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그의 대장이 잡히게 되고 파블로는 살게 된다. 파블로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웃는데... 이것이 바로 운명의 벽이다. 자신의 마지막 의지로 선택한 것(죽음)마저, 운명의 벽에 봉착해버리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죽음마저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벽>을 통해 샤르트르는 인간의 존재를 끝까지 밀어 붙였다. 카뮈도 인간을 극단까지 밀어 붙였지만, 네번째 벽까지 밀어 붙였다. 하지만 샤르트르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선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샤르트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매일 똑같은 일상을 지내며 살아간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선택으로 벽으로 온 것도 아니고, 우연의 일치로 세상이라는 벽에 떨어진 것이다. 인간은 세상이라는 벽 속에서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부조리의 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샤르트르가 주장한 그의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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