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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Oct 16. 2021

가난하지 않은 직장인이 된다는 것

오늘을 가장 요란하고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다.

최근 읽은 에세이집 양다솔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과 강이슬의 ‘새드엔딩은 없다’ 그리고 하현, 김이슬의 ‘우리 세계의 모든 말들’의 주된 글감은 가난과 우정이었다. 물론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가 있고 생각은 달랐지만 나는 공통적으로 20대의 가난함에 대해 생각했다. 동정하거나 안타까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가난하지 않은데 그럼 나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나? 살짝 부러워하며 나의 20대를 떠올려봤다.

     

나는 ‘밥 잘 사 주는 누나’였다. 이쁜 누나는 아니었지만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교회 동생들한테 밥을 잘 사던 대학생 언니이자 누나였는데 취업이 되지 않아 타이틀 없는 취준생의 시절을 길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눈치 없는 후배 두 명이 서현역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또 자기들끼리 놀다가 밥 사달라고 나를 부르나 싶어서 망설였다. 밥을 사 줄 돈도, 마음도 턱없이 부족했던 취준생이었는데 돈이 없다고 내가 지금 너희랑 이러고 다닐 때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어 친구를 데리고 서현역으로 나갔다. 그냥 떡볶이나 한 접시 사줘야겠다, 여차하면 친구보고 내라고 해야겠다 싶었는데 웬일로 그들은 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선물을 사 주겠다며 나를 14K 주얼리 샵으로 데려갔다. 무조건 마음에 드는 거 고르라고 큰 소리를 치는 후배를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장난을 치나 싶었다. “야, 나 돈 없어.” 기어이 쪽팔리는 문장을 내뱉었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누나를 위해 선물하는 거라고 했다. 한 번도 나에게 뭘 사 준 적 없던 철없는 후배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은 마음과 내가 돈도 못 벌고 맨날 집에만 있으니 불쌍해 보였나 싶은 마음에 고맙기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도 그날은 돈도 타이틀도 없는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진 날로 기억된다. 느닷없는 고가의 선물에 감동하고 행복해하기보다 돈 한 푼 쓰지 못했던 수치스러웠던 날, 서현역 AK플라자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내가 떠오른다. 돈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꼬여 가난했던 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은 에세이의 주인공들은 비슷한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어서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꼬이는 마음이 문제였다. 어쨌든 어쩔 수 없었다. 마음까지 다림질할 수는 없었다. 그때의 내게 왜 사 주는 것만 당연하고 받는 것에 그렇게 자존심 상해했는지, 그것도 교만이라고 다그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그날의 기억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밥을 사 줄 때마다 행복을 느끼니까.     


나는 언니가 계속해서 걱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일을 잘 안 하게 되니까. 걱정이 언니 곁에 오래오래 붙어서 그를 지켜주길 바랐다. 그래도 언니는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고마운 걸 표현할 수 있는 요즘이 좋다고. 좋고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잘됐다고. [새드엔딩은 없다_강이슬/웨일북]     


슬럼프와 무기력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날, 강이슬 작가는 유튜브에서 입 짧은 햇님이 언니가 음식을 씹어 삼키며 행복 해 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이란 게 별 게 아니란 생각을 했단다. 그 후로 한참 지나 예능 작가가 된 강이슬 작가는 ‘입 짧은 햇님’을 섭외하며 햇님이 언니가 사주는 맛있는 밥을 먹으며 언니를 응원했다. 막내분들이 가장 애를 쓰신다고 들었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밥 사는 거 말고는 없다며 밥을 사는 햇님이 언니를 보며 언니가 여럿의 우울한 새벽들을 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내가 주변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우울한 새벽을 구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밥을 사 줄 수 있는 지금이 좋다. 밥을 사 줄 수 있는 월급을 주는 회사가 소중하고 나의 가난했던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책들이 고맙고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하며 글을 쓸 수 있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그래서 정당한 노동을 통해 성실한 월급을 받는 삶을 월급쟁이라고 폄하하고 싶지 않고 SNS에 자랑하기 위해 맛집에 다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을, 가장 맛있고 좋은 곳에서 요란하게 기념하고 싶다. 기왕이면 오래오래 기억에 남도록 SNS에 남기고, 그날의 날씨와 뱃속까지 찌르르하게 행복한 감정을 한 문장 한 문장 생생한 글로 남겨 내 인생을 기억하고 싶다. 그러면 평범한 날도 그럴싸해졌고 유난히 힘들었던 직장상사의 변덕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으니까. 나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나와 비슷하게 위로하고 싶다.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그러모아 오늘도 내 삶을 기념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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