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도 새 해를 맞이하면서 점괘를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음... 아마도 있을듯. 어쩌면 여전히 많을지도 모른다. 흰 도화지와도 같은 새 해에 어떤 일이 있을까 길흉화복을 미리 알고 싶어하는 심리는 인지상정이리라. 나는 헤외에 살기에 여의치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점보러 가고싶지는 않을 것 같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거고 살아오면서 형성된 '나'대로 대응할테니까. 자만처럼 보이는 자신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리 안다해도 비방까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다.
우리는 태어난 연, 월, 일, 시로 구성되는 사주도 신경쓴다. 과학 문명과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된 시대에서도, 아니 어쩌면 그 덕에 가능하니까, 아기를 낳기 전 좋다는 사주를 미리 알아보고 일이나 시를 조절함으로써 좋은 사주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나는 명리학은 잘 모르지만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신점을 보는 것도 미신이라고 일축하는 편은 아닌데 명리학에서 말하는 사주에 인간의 생애를 결정짓는 길흉화복이나 운수가 들어있다는 설명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입장이다. 다만 심취하지 않고 삶에서 지침으로 삼지 않을뿐이다. 무엇보다 근본을 파고들어갈만큼 부지런하지 못한 탓이 크다.
사주, 태어날 때 주어지는 연, 월, 일, 시는 바뀌지 않는 것이고 다만 그때그때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줏어들은 기억이 있는데 설득력이 있는 말로 받아들였다. 흔히 운명은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 왈가왈부하지만 거창하게 '운명'을 바꾸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의 방향은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바로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계속 행하는 일들이 곧 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지 않은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 그 자체가 곧 너 자신이다'라고. 나는 그것을 이름하여 신 사주팔자라고 칭한다.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 네 가지를 뽑아 삶의 기둥을 삼는 것이다.
나의 경우 첫번째 기둥은 운동이다. 몸뚱이가 부실하면 나 라는 실체자체가 부실하므로. 두번째 기둥은 108배 수행이다. 인간이 살면서 괴로운 이유는 어리석어서라고 하지 않는가. 편협한 한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아집에 갇혀 바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하기싫은 108배를 매일 반복적으로 하려고 한다. 세번째 기둥은 독서. 배움과 성찰이 없는 삶은 안개속에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하는 일이나 숲속에서 방향을 모르고 마구잡이로 헤매는 일에 비유하겠다. 네번째 기둥은 영어. 해외에 살기 때문에 영어가 늘 중요하고 또 늘 목마른 실체이므로 나의 경우 한 기둥이 될 수 밖에 없다.
안됐게도 나의 이 네가지 기둥들은 튼튼하게 뿌리박히지 못하고 언제나 불안정한 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들이 굳건히 잡힌다면 삶이 나를 끌고가련만. 나는 갑진년 새 해를 맞아 한 해의 내 팔자를 만들어줄 신 사주를 다시한번 보듬을 뿐 다른 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