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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일

여유를 선물하기

by 하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뭐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다. 좋은 것 먹이고, 선물하고, 보여주고 싶은 게 사실이다. 정작 나를 사랑하는 일은 무얼 했을까. 요즘은 나를 위한 선물을 자주 하려고 한다.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수고한 나 자신에게 남들에게 하는 것만큼 아끼지 않으려고 한다. 취미로 글도 쓴다. 글을 쓴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 가끔 내가 뭐라도 된 것 마냥 착각하거나 그럴 순 있어도 내 삶이 요동치게 변한 건 없다. 남들보다 특별히 다른 삶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취미가 한 가지 더 늘어났고 현재 나는 여기에 꽤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사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별게 아니다.


가끔 해오긴 했지만 전에는 스스로에게 딱히 보상을 안 해줬다. 늘 앞을 향해 달려가기 바빴다. 주변도 못 돌아보고 임용시험만 준비했던 그때. 나에겐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마음에도 지갑에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날이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이었고 그 외는 가장 싼 커피 한 잔을 한 달에 한두 번 겨우 사 먹었다. 식비도 아끼려고 엄마에게 점심과 저녁 매일 두 끼의 도시락을 싸 달랬다. 버스비를 아끼느라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동선을 최대한 줄였다. 독서실은 나와 안 맞다는 핑계를 대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만 전전 긍긍했다. 과거의 내가 안쓰럽긴 하지만 그땐 그밖에 선택권이 없었다. 내겐 최선이었다. 공부하느라 많은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나를 위해 옷 사입은 것도 당연하다. 나는 오라 하는 직장도 포기했으니까.


학원비는 엄마카드로 긁었고 그래도 양심상 생활비는 엄마한테 손 벌리기 싫었다. 알바를 병행했다. 시험에 방해가 될까 봐 주 2~3회 그것도 4시간 이상을 넘기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벌었으니 내 통장엔 매달 교통비와 교재비 기타 용돈 조금 쓰면 끝이었다. 처음 공부 시작할 땐 연애도 하고 있었다. 정말 나에겐 사치였다. 그래서 같이 점심 한 끼 사 먹을 때도 비싼 밥 한 번 못 사주고 늘 미안했다. 결국 연애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투정만 부리다가 끝나버렸다. SNS에 친구들이 첫 월급을 타서 부모님께 용돈 박스 선물하는 사진이 올라올 때면 너무 죄송했다.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 빚지고 있는데. 몇 년 지나니 친구들은 차를 구입하기도 했고, 명품 백 사진도 올라왔다. 주식을 한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도 가질 못했다. 정말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시험이 끝나면 일 년에 한 번씩 국내 다녀온 게 전부. 이 깜깜한 터널의 끝이 안보였다. 도서관에서 가장 늦게 짐을 싸서 나오면서 집에 터덜터덜 걸어가는 날이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이유 없이 육교 위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보면서 엉엉 울었다.


당장 취업을 해야 했다. 더 이상은 꿈이 밥을 먹여주진 않더라. 남들은 올인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냐고 했다. 알바 조금 병행했지 난 올인이었다. 정말 모든 걸 올인했다. 그런데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사실 진짜 원하는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나는 할 만큼 했다. 나는 내 노력을 아니까. 운이 안 따랐을 뿐이다.


처음으로 내 통장에 4대 보험을 든 직장으로부터 꼬박꼬박 수입이 들어왔다. 첫 월급은 첫 열매를 드렸다. 그다음부터는 미뤄뒀던 학자금을 성실히 갚았고 가족들에게 밥을 샀다. 엄마에게 매달 아주 작지만 용돈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수험생이라고 정말 많은 친구들에게 밥을 얻어먹었었는데 나도 이제 살 수 있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일단 먹고살 수 있어야 소속감, 애정 그런 게 소용 있는 것이지. 내 우선순위가 잘못되었던 걸까.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게 가장 어렵더라.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런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 여전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여유가 생기니까 그동안 미뤄뒀던 글쓰기가 하고 싶었다. 대학생 내내 들고 다녔던 노트북이 오래되어서 문서작업 하나 하는 것도 너무 느렸다. 월급을 타고 가장 먼저 노트북을 샀다. 그리고 그토록 쓰고 싶었던 글을 쓰고 책을 냈다. 얼떨결에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됐다. 여유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책을 통한 수입은 거의 없지만 가끔 몇 천 원씩이라도 통장에 들어올 때면 뿌듯하다. 직장을 다니는 일도 이제 적응이 되었고 내 몫은 하는 것 같아서 눈치도 덜 보게 되었다. 먹고 싶을 때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친구들과 더 자주 보게 되었다. 여행도 즉흥적으로 떠날 수 있다. 나에게 선물도 해준다. 나는 내가 이상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매우 현실주의였다. 여유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더라.


그렇다고 돈을 펑펑 쓰는 건 아니고 예전의 소비습관을 유지하고 있지만 전처럼 나에게 가혹했던 그런 시절은 사라졌다. 다음번에 또 책을 쓰려면 자비 출판을 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선 일을 계속해야 한다. 요즘 참 행복하다. 코로나로 인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시기에 안정적인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소소한 일들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삶은 환경에 의해서든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든 어찌 되었든 계속 변한다. 지금의 모습에 만족하면서도 안주하지 않을 때 더 나은 모습의 내가 되어있을 거다.




넷플릭스로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봤는데 내게 인상 깊게 다가온 건 박서준이나 박민영이 아니었다. 고귀남이라는 워커홀릭 캐릭터로 등장한 황찬성과 그를 쫒아다니는 김지아 역할의 표예진 커플 이야기였다. 고귀남은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 미뤘다. 실제로 황찬성이 회사생활을 하고 옥탑방 생활을 했던 경험을 녹여낸 캐릭터라고 했다. 찌질 궁상남이라는 별명을 얻을 때도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동질감을 느꼈는데 임고생 그때의 내 모습 같았다. 그를 변화시킨 건 표예진이였다. 표예진은 황찬성에게 대범하게 고백했지만 연애할 형편이 아니라며 거절당했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 16화-tvN

그런 고귀남에게 김지아는 고귀남이 좋아하던 꿔바로우를 선물하며 “여자를 사랑하는 건 미뤄도 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학과 티셔츠 그만 입고 멋진 옷도 사 입고, 건강 생각해서 삼각김밥 그만 먹고 밥다운 밥 좀 먹고.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우리 나이답게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런 대사를 하는데..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마음이 묵직했다. 결국 마음이 움직인 황찬성은 데이트를 신청하고 둘은 커플이 된다. 내가 괜히 흐뭇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일은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방식이든 여유를 만들어 놓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여유마저 잃는다면 그 목표도 허무해질 수 있다. 목표 뒤에 늘 원하는 일들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을 품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허무해질 때도 있다는 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여유를 갖고 시작한다면 목표 뒤의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여유가 있으니까. 목표는 그저 하나의 성취일 뿐이다. 그래서 여유를 갖는 일, 나를 사랑하는 일은 너무 중요하다. 나는 요즘 여유를 갖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러고 나니 목표도 다시 선명해진다.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겼다. 이제 새로운 일들을 향해 또 달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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