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가능한 일상을 살다
[여행이 끝난 후 D+5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자 적응의 동물이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돌아온 지 한 주가 채 되지 않아 여행 전으로 돌아왔다. 끝이 없는 육아와 누적된 피로. 글을 쓰고 싶지만 좀처럼 시간과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푹 자고 싶지만 편히 잘 수도 없다. 이렇게 나는 여행의 마법에서 완전히 풀려났다. 여행 중 발휘했던 초인적인 힘은 마법과 함께 사라졌고, 여행 중 유지되었던 기분 좋은 긴장감도 사라졌다.
여행 중 일상은 별거 아닌 모든 것이 특별했지만, 여행 후 일상은 정말 별거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편한 생활에서 모든 것이 편리한 생활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첫날만 그 편리함을 자각했지 나는 또 금세 익숙해져 버렸다. 어쩌면 내가 망각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상에 적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아이 밥을 해 먹이고
아침 먹은 걸 정리하고
아무리 해도 티 안나는 청소를 하고
쌍둥이 아가 둘의 우유를 먹이고
이유식을 만들고 이유식을 먹이고
똥 기저귀를 갈고 엉덩이를 씻기고
유치원에서 돌아온 큰 아이 저녁을 먹이고
저녁 먹은 걸 정리하고
아이들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재우고
밤중 수발을 들고
다음날 아침 또다시 피곤한 채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렇다. 나의 예측 가능한 일상은 하루를 맨 정신으로 잘 버티는 것만으로도 빡센 세 아이 육아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쳇바퀴가 굴러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무의미한 몸부림에 그칠지라도 뭐라도 해봐야겠다.
현실과 싸우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했으니 메말라 가는 상상력을 쥐어짜 내 봐야겠다.
어제와 다른 행동을 한 가지라도 해 봐야겠다.
피로에 묻힌 이너 보이스에 다시 귀를 기울여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