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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고메리 Sep 09. 2023

15화.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

가장 힘든 시간에 꿈을 생각했다.

  매년 학기초가 되면 우리반에 어떤 아이들이 있을까? 먼저 명렬표를 살펴본다. 그리고 나서 개학을 하면 보건선생님께서 학생 건강조사서 서류를 보내주신다. 각 가정으로 조사서류를 보내고 가정에서는 정성껏 아이에 대하여 참고할 사항들을 보내주신다. 학교에서는 급식관련하여 알레르기학생을 조사한다. 또한 비염, 천식 등 학교 생활에서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는지 면밀히 살펴본다. 중요한 사항들은 담임교사, 보건교사 뿐만 아니라 전담교사와 아이들 담당하는 선생님들이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건강관련 조사가 꼭 필요한 과정이다.


  또한 학기초에 학부모 상담기간이 있다. 사전에 조사기간을 통하여 상담하고자 하는 목록들을 설문하고 상담을 준비한다. 주로 있는 항목은 학업 관련 상담, 교우관계, 성격관련, 기타로 나뉘어 진다. 나는 이 항목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건강관련’은? 건강에 대한 항목이 빠지면 마음속으로 그 항목을 추가시킨다. 상담기간에는 보호자에게 좀 더 자세한 학생에 대한 정보와 생활 전반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 나누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참고할 사항들을 알 수 있는 기간이다.


  간혹 정기적으로 병원진료를 받고 있거나, 치과 교정을 하고 있거나 하는 경우 가정에서 이런 일정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다 라고 말씀을 해 주시면, 교육일정에 참고가 된다. 



  나 또한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이기 때문에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아침에 주로 하는 말은


“공부 열심히 하고 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

“오늘 컨디션은 어때?”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남자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서, 대화가 많지는 않지만 이런 대화는 거의 매일 하는 것 같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응원의 말을 하기는 하지만, 내 마음속에 바람은 아이의 하루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아프지 않고 건강한 하루가 되면 충분한 것 같다.

나의 기준에서는 가족의 건강이 최우선이다. 개인적으로 둘째 아이를 키우면서 있었던 아픈 경험때문이었을까? 우리 가족은 더욱 단단해졌고, 강해졌다.     



 

한없이 손으로 가슴을 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경험이 있다. 한 번은 서른을 넘기고 큰 아이가 돌잔치를 마치고 얼마후 친정엄마가 뇌출혈로 하늘 나라로 가셨을 때,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또 한번의 힘든 경험은 그로부터 5년 후 둘째아이라 태어나고 백일을 넘긴 직후였다. 우연히 백일사진 촬영을 하러 갔다가 포토그래퍼님이 말씀을 해 주셨고 그 후로 지역 병원을 거쳐서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서울대병원을 먼저 갔고, 그곳에서 교수님의 냉정한 말씀을 들었다. 그 냉정한 말씀이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서울삼성병원에 가서 약물치료의 과정, 수술의 과정, 그 후 정기 검진까지 꽤 오랜 기간동안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는 교수님의 냉정한 말씀에 많이 울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두 병원의 교수님 모두 최선의 판단을 해주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2년 6개월동안 일했던 영어강사의 일은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두게 되었다.

치료의 기간이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부정하고 싶고, 아니길 바랬는데.....


  어린이병동에서 만난 많은 아이들은 힘들지만 모두 씩씩하게 견뎌내고 있었다. 병동의 보호자들. 주로 엄마와 아빠였다. 하나같이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오던 분들이었다. 왜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 왔을까?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병동에는 보호자 한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피검사를 해야 했고, 치료에 지친 아이들은 몸무게를 재는 저울 앞에서도 울음을 터트렸다. 그냥 키를 재고, 몸무게만 재면 되는 것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또한 예측하지 못한 고통이 있을까봐 힘들어했다.

멘탈이 약한 나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다. 둘째는 돌이 안 된 아기라서 채혈잡기가 어려워서 여러 번 바늘로 찌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입을 틀어막고 차마 볼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나중에 같은 병실에서 치료 경험이 많아서 이미 그런 것을 겁내지 않는 한 엄마가 말해주었다.


“준이 엄마, 처음 왔을 때 정말 황당했어”

“피뽑는 걸 못 보고 입을 틀어막고 그랬어. 왜 그래?”     


치료 과정에서 수많은 검사와 고통을 이겨냈기에 엄마들은 정말 강해져 있었고

그 속에서 힘을 받고 그렇게 병원 생활을 해 나갔다.     

검사 하나를 하려고 해도,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상황들...


병원생활을 했을 때 장난감을 물고 있던 준이

                       


준이에게,

왜 그렇게 큰 병이 어린 우리 애기한테 왔을까? 엄마가 정말 미안해.

힘든 치료과정과 수술과정을 건강하게 극복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

엄마 소원은

준이가 평생 무병장수하면서 건강하게 자라는 것.     



많이 아파서 준이가 힘들었지만,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었던 첫째 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집에 큰 일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유치원에서는 둘째가 아파서 엄마랑 서울 큰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이 마음을 써주셨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마음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병원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집이 그리웠다.

한번씩 집에 오면 아이는 너무나 편안하게 잠을 자고 그 평화로움이 좋아서 사진으로 남기게 되었다.


아이가 편안하게 집에서 쉬는 그 시간이 참 감사했다.


                                                                                                   

  수는 5살 터울의 동생을 끔찍하게 아꼈다. 풍선도 불어주고 이불도 깔아주고 책도 펴주고 놀아주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햇빛이 강하면 손으로 햇빛을 계속 막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



당시 서울의 병원에 가는 길은 참 멀었다. 지방에서 올라가야 했고, 늘상 교수님 진료예약시간은 오전이기 때문에 아이짐챙기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차를 탔다. 늘 긴장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가서인지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두통에 시달렸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 와중에 아이를 안고 남편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아이치료가 다 끝나고 건강해지면...하고 싶은 일에 대한 대화     



오빠, 준이 치료끝나면 임용공부를 해서 시골로 가야겠어

공기 좋고 한가한 시골에서 아이들 키우는 게 예전부터 꿈이었어.

나는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고, 아이들도 시골학교에 다니며 지내는 거야.

정말 멋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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