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한 걸음이면 됐다
오늘은 괜히 마음이 복잡해서 집을 나섰다.
이유를 묻는다면 딱히 없는데,
가만히 앉아 있기엔 생각이 너무 많았고,
가만히 눕기엔 마음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냥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목적지도 없고, 어디를 가야겠다, 뭘 해야겠다
그런 계획도 없이 휴대폰도 주머니에 넣은 채,
조금은 멍하게, 조금은 엉켜 있는 마음을 데리고
그냥 걸었다.
길거리엔 사람도 드물었다.
늦은 밤의 골목은 조용했고,
가로등 불빛만이 내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누가 나를 알아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 시간.
그게 왠지 모르게 편했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기분.
낮 동안 엉켜 있던 감정들이
한 걸음 한 걸음에 풀리는 듯한 느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하루도 별로였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조금씩 걷다 보니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네’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계획 없이 걷는 밤에는
내 마음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낮엔 바빠서 못 들은 속마음들이
밤의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떠오른다.
“오늘 사실 너무 지쳤어.”
“괜찮은 척했지만, 조금 서운했어.”
“아무것도 못 했다고 자책하지 마.”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싶다.
그리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나 자신밖에 없을 때가 많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더라.
나는 늘 무언가를 하려고 애쓴다.
하루를 보람 있게 보내야 한다고,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늘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근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애쓴 하루가 아니어도,
오늘 내가 이렇게 걸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닐까?’
발끝에 힘이 빠지고,
한참을 걸어 나오고서야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계획 없이 걷는 밤.
그건 어쩌면 내가 나를 돌보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말도 안 하고,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지만
조용히 나를 꺼내어 들여다보는 시간.
사람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아도,
꼭 어딘가를 향하지 않아도
혼자 걷는 밤길에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그 길 위에서 깨닫게 되는 것들.
‘나는 오늘도 나름대로 잘 버텼고,
지금 이 순간, 나 자신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충분히 의미 있다’는 사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처음보다 숨이 덜 막혔다.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고,
혼자 있는 이 시간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가끔은 계획 없이 걷는 밤도 괜찮다.
그저 나를 위해 걷는 시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정해진 루트를 따르지 않아도
나는 지금, 잘 가고 있는 거라고.
나는 오늘도 나를 안아준다.
“조금 부족해도, 오늘의 나는 충분히 잘 살아냈다.”
우리는 같은 밤을 지나고 있었구나 @은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