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털실이 있는 곳

우울증과 뜨개질을 엮어서

by 모서리

버스를 타고 십 분 정도 달려서 병원이 모여 있는 거리에 내린다. 높고 빽빽하게 달린 병원 간판들을 따라서 오 분쯤 걸으면 작은 털실 가게 하나가 나타난다. ‘대영 털실’ 간판이 병원의 것과는 다르게 낮고, 글자들이 사이가 멀찍이 달려 있다. 그 느슨함이 좋아서 버스 배차 간격이 크더라도 기다렸다가 가게로 향한다. 오 평 정도 되어 보이는 오래된 가게에는 세 벽면이 털실로 가득 차 있다. 털실 사이트에서는 보지 못했던 종류가 한가득이다. 보고 또 본 털실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본 후 필요한 만큼의 타래를 계산해본다.


그때 한 손님이 가게 앞에서 입구를 둘러본다. 입구에는 커다란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바구니, 고무장갑 따위를 늘어놓고 파는데 손님들은 대개 그것들을 사 간다. 털실 가게이지만 털실을 사 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손님이 비닐봉지 한 묶음을 달라고 한다. 괜히 속상해서, 두 타래 정도만 사려 했는데 더 사기로 한다. 세 타래와 네 타래 중에 고민하니 주인 분이 이왕 사는 거 짝수가 좋을 거라고 유쾌하게 말한다. 마주 웃으며 기분 좋게 네 타래를 산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버스를 타고 카페로 향하면서 새로 산 실 실로 무얼 뜨면 좋을지 생각한다. 털실 풀어지듯 잔잔하고 고요한 기분이 온몸에 퍼진다.


카페에 도착해서 바닐라 라테를 시킨 후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다들 휴대전화를 보거나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그 사이에서 털실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린다. 새로 산 털실은 신기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사슬처럼 엮인 가느다란 털실들이 모여 하나의 털실을 이룬다. 털실을 끊으면 사슬이 빠르게 풀려버리기 때문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털실을 고른 이유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제껏 접하지 못한 새로운 털실을 만져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만 해도 설렌다. 이 털실은 가느다란 털실에 날개 털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동물의 갈기 같은 느낌을 준다. 편물을 뜰 때 코가 잘 보이지 않을 듯해 걱정되지만 우선 시도해보기로 한다. 걱정보다 설렘이 앞선다. 털실을 풀고, 코바늘을 잡는다.


이렇게 종종 카페에 올 때 소지품을 넣어 다닐 수 있는 가방이 있었으면 해서 숄더백을 만들기로 한다. 사슬 스무 개를 만든 다음 한 코에 하나씩 한길긴뜨기를 빙빙 둘러 가며 떠주면 바닥 면이 만들어진다. 예상보다 더 코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날개 털실들 탓에 여기가 코인지, 저기가 코인지 헷갈린다. 결국 풀었다 다시 뜨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답답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천천히, 중간중간 라테를 한 모금씩 마셔 가며 숨 돌릴 틈이 있어서 좋다다. 날개 털실을 치워가며 한 코에 하나씩 한길긴뜨기를 뜬다.


창밖으로 노을빛이 쏟아진다. 진한 햇빛이 네모나게 책상에 드리운다. 햇빛에 비춰보며 코를 찾아 나간다. 어느새 컵에는 얼음만 몇 알 남고 컵 아래로 물이 흥건하다. 바닥 면을 완성한다. 바닥의 짧은 세로 면을 손가락으로 톺아보며 큰 구멍들을 찾는다. 구멍마다 한길긴뜨기를 두세 개씩 한다. 긴 세로 면에는 한 코에 하나씩 한길긴뜨기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옆면이 완성된다. 날개 털실 때문에 단 수를 세기 어려워서 보기에 적당한 길이가 될 만큼, 마음에 드는 길이가 될 때까지 옆면을 떠준다. 사슬뜨기로 손잡이를 만들어주고 각각의 사슬에 빼뜨기를 해서 손잡이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그럼 숄더백 완성이다.


파우치와 에어팟, 책 한 권을 넣으니 딱 알맞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저녁이다. 사람들이 깊은 어둠을 헤치고 어디론가 향한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들고 왔던 가방에서 소지품을 빼고 새로 뜬 숄더백에 넣는다. 그리고 다시 향한다. ‘대영 털실’로.


털실 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후다. 아쉬운 마음에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온다. 다음에 올 때 이 숄더백을 들고 와야지 생각한다. 그리고 사장님에게 이리 전하고자 다짐한다. 당신이 파는 털실로 이렇게 멋진 가방을 만들었다고, 그러니 계속해서 털실을 팔아 달라고. 이 자리에 또 올 테니 여전히 이 자리에 있어 달라고. 발걸음을 돌린다. 천천히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털실 감듯 집으로 돌아간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9화괜찮을 거라는 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