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서 살롱] 신두란 고마워서그래 주인장
창고살롱 시즌2 두 번째 레퍼런서 살롱 '소소하게 벌며 좋아하는 일 하기'. 어쩌면 모두의 소망이지 않을까요. 이 꿈같은 이야기를 실천하고 있는 분, 레퍼런서 신두란님을 만났어요.
레퍼런서 살롱은 삶의 변곡점에서 나만의 선택을 내린 경험이 있는 레퍼런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데요. 두란님도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기까지 많은 변곡점을 지나왔어요.
천안에서 수제 그래놀라와 비건 디저트를 파는 작은 가게 '고마워서그래' 주인장 두란님. 선주문 후제작 방식이라 매장 판매는 하지 않고 온라인에서만 살 수 있는데요. 맛이 좋아 창고살롱 멤버들에게도 인기가 많지만 판매 원칙에서부터 풍기는 단단한 면모에 두란님의 뒷 이야기도 궁금했어요.
한 번도 '창업'이란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혼 이주, 경력 공백, 첫째 아이의 음식 알레르기 그리고 응급실에 실려갔던 밤... 길고도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고마워서 그래'까지 왔는데요. 이 길에서 만난 변곡점에서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붙잡아준 사람들, 문장들 덕분에 주저앉지 않고 시도하며 나아간 값진 경험을 레퍼런서 살롱에서 들려주었어요.
두란님은 첫 직업은 지역 미디어 센터의 미디어 활동가였어요. 지적장애 청소년, 유아, 이주여성, 어르신 등 다양한 사람들과 사진집∙영화 등을 만들어 전시∙상영하는 미디어 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했죠.
"굳이 돈과 좋아하는 일의 우열을 가리자면 좋아하는 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큰돈을 벌진 못해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 건 '결혼' 때문이었어요. 주말부부는 안 된다는 양가 부모님의 말, 그때는 그 말을 따라야만 할 것 같았죠. 남편 직장을 따라 아무 연고 없는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 두란님. "마냥 행복할 줄 알았던 신혼생활이 눈물로 기억되는 이유는 외로움도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일과 돈이었다"고 회고했어요.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고, 돈을 펑펑 쓰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리만큼 엄청나게 눈치를 봤다"고요.
"당시 누군가 제게 '요즘 뭐해?'라고 물으면 '놀아'라고 말하는데 서글펐어요. 직장이 없으니 소속감도 없고, 아주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게 주는 미래에 대한 계획, 무얼 할 수 있는 자유가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두란님은 지역 맘카페에서 '손부업 모집' 글을 발견했어요. '21세기에 손부업이라니. 나름 4년제 대학 나왔는데 이런 거 못 해'라고 할 줄 알았지만 두란님은 손부업을 하기로 했어요. 핸드폰 케이스에 가죽을 붙이는 일이었죠. 아무 연고도, 직장을 구할 에너지도 없었던 당시 두란님이 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일이었어요. 작은 돈이었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번다는 감각이 정말 좋았어요. 손부업에서 자신감과 깨달음을 얻어 천안의 모 대학 홍보팀에서 계약직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이후 첫째 아이 출산으로 다시 일을 그만두는데요. "여기까진 평범한 인생"이었다며 이후 출산과 육아가 완전히 뒤바꾼 삶을 예고했어요.
'내 손으로 버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던 두란님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자 '엄마'라는 직업에 몰두했어요. 좋은 엄마가 되지 않으면 실패한 사람이 될 것 같아 '나의 욕구'는 꾹 참아가며 육아에 헌신했죠. 첫째 아이의 음식 알레르기는 두란님을 육아에 더 집착하게 만들었어요. 의사는 "엄마가 얼마나 아이를 잘 챙겨줬는지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고 말했죠. 피검사를 할 때마다 ‘엄마 테스트'를 하는 시험대에 오르는 것 같았어요.
음식 알레르기 때문에 어린이집에 다니지 못한 아이가 친구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기관에서 생기는 알레르기 사고에 겁이 났어요. 동네 유치원에 입소 신청하며 먹으면 안 되는 음식과 증상을 써 제출했을 때 "아이고, 어머님 저에게 짐을 주시네요."라고 했던 선생님의 말도 상처가 됐죠. 직접 공동육아를 해보자는 생각에 보육교사 자격증, 유아숲지도사 자격증을 땄어요.
다행히 지인 소개로 찾은 유아숲 대안기관에서 따뜻하게 두란님과 아이를 맞아주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공동생활을 시작한 아이는 "다른 애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묻는 일이 많아졌어요. 우유 알레르기 때문에 빵을 먹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두란님의 비건 빵집 투어가 시작됐어요. 오로지 빵을 사기 위해 기차 타고 여행을 다녔죠.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배려가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둘째는 정상이지?" 같은 말을 듣는 건 다반사였어요. 한 학교에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 학부모에게 "아이 사망 시 학교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른바 '목숨각서'를 요구한 사건이 벌어져 큰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두란님은 음식 알레르기에 대한 차별 개선을 촉구하는 카드뉴스를 만들어 알렸어요.
이런 두란님의 노력을 알아챈 교회에서도 아이들 간식에 더 신경 써 주셨어요. 아이들이 다니는 교회학교에서 빵 대신 떡이나 과일, 우유나 요구르트 아닌 주스로 대체 간식을 준비해 주신 거죠. 알고 보니 교회학교에는 음식 알레르기, 아토피를 겪는 친구들이 더 있었어요. 배려 받은 감사한 마음이 두란님을 또 움직였어요. 아이들 생일 파티에 택배 배달이 어려운 비건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 주기로 한 거예요. 두란님이 비건 베이킹 세계로 입문한 계기가 됐어요.
"지금 돌이켜보니 아이 알레르기 때문에 시작한 일들은 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었어요. 제가 알레르기 증상에만 급급했다면, 오로지 우리 아이만 보호했다면 오늘의 저는 다를 거예요. 알레르기 덕분에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교회에서 받은 배려와 누군가의 따뜻한 말이 나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죠. 장애인미디어교육을 하면서 장애인권에 관심 가졌던 것처럼 알레르기를 통해 소수자의 마음을 아주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됐던 것 같아요."
두란님은 아이 알레르기 때문에 예민해지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부부 연차 제도'를 도입했어요. 직장에 다니는 남편, 육아와 가사를 도맡은 자신 각자에게 회사에서처럼 1년에 14일 연차 휴가를 주는 거죠.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전업주부의 노동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죠.
그렇지만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두란이는 평일에도 노는데 어딜 또 놀러 가냐", "아빠가 참 대단하다". 다시 돈을 벌기로 했어요. 전업주부 7년차,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아이 둘. 두란님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어요. 블로그 관리 등 인터넷 부업과 방과후 교사, 유튜브 콘텐츠 제작 등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잠까지 줄여가면서요.
어느 날 밤,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깬 남편은 숨을 쉬지 않는 두란님을 발견했어요. 이미 얼굴색이 달라져 있었죠.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가 겨우 살았어요. 각종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 "건강에 문제가 없어도 살다가 누구나 이런 일을 겪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가는 데엔 순서 없다'는 말을 새삼 깨달았죠.
"그동안 잠을 깎아서라도, 무리를 해서라도 일했던 저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준 사건이에요.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이라도 살아 있지 않으면 소용없으니까요."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건강하게 돈 벌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어요. 처음엔 미디어공부방을 구상했는데요. 갑자기 남편이 퇴사 계획을 통보했고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러다 아이들 등하원 길에 우연히 '임대 광고'를 봤고, 순식간에 계약을 마쳤어요.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들을 위한 비건 베이킹 공방. 마음이 급해지니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본능적으로 튀어 나왔어요.
'6개월 월 임대료 무료'라는 파격 혜택에 6개월 동안 실험을 해보기로 했는데, 코로나가 시작됐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 2개월이 지났어요. '계획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어요. 하지만 곧 '공동체의 힘'으로 결정적인 기회를 만나요.
두란님은 책 <엄마의 20년> 등을 쓴 오소희 작가의 '언니공동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언니들의 응원으로 '고마워서그래' 그래놀라를 이곳에서 처음 선보였어요. 예상보다 많이 팔렸고, 상시 구매 요청도 있어 온라인 스토어까지 열었는데요. 이 경험으로 '고마워서그래'가 자리 잡았고, 유명 식품 판매 플랫폼에도 입점했죠.
두란님이 차곡차곡 쌓아 온 작지만 단단한 여러 시도와 경험에 공동체의 힘이 더해져 '고마워서그래'가 탄생하고 자리잡게 된 거예요.
"저는 '고마워서그래'가 저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받은 사랑과 응원은 기억해두었다가 불려서 갚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받은 사랑과 응원을 더 크게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고마워서그래는 시작됐어요. 돈은 벌지만 아무렇게나 벌고 싶지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으로 두란님은 정직하게 제품을 만들고, 친환경 포장을 고민하고, 택배를 보낼 때 단 한 줄이라도 손 편지를 쓰고 있는데요. '고마워서그래'를 운영하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이라며 모베러웍스의 책 <프리워커스>의 한 구절을 소개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왕이면. 한 번뿐인 인생 잘 살고 싶은 마음과 마찬가지로, 돈 벌려고 하는 일이지만 '이왕이면' 자유롭고 의미 있게 잘 해내고 싶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끌려가듯 하고 싶지 않다. 재미있게, 우리답게 일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나아가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면서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 같은 재료의 음식도 '이왕이면' 근사하게 차려내고 싶은 마음이다."
이날 레퍼런서 살롱을 들으며 두란님의 단단한 면모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게 됐어요. 절망적일 것 같은 순간에서도 작고 느리지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긍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주저앉지 않는 삶의 태도였어요. 두란님이 무너지려 할 때 자신을 붙잡아줬다고 소개한 두 개의 문장도 두란님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결국 좋지 않은 일까지 모두 자양분이 되더군요" - <키키 키린> 키키 키린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걸 선택하고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 <여덟 단어> 박웅현
두란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은 아니에요. 두란님은 지금도 '소소하게 벌며 좋아하는 일 하기'를 이어가기 위해 고민중이랍니다. 비슷한 고민이 있는 분이라면 두란님과 함께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지속적인 수익을 고민하고 있어요. 신념과 열정만으로 무언가를 하다 보면 그저 인정 욕구만 남게 되잖아요.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인데 결국 지쳐서 그만두게 되죠. 그러고 싶지 않아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남편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선을 지키려다보니 어렵긴하네요."
울퉁불퉁하면서도 단단한 두란님의 이야기에 이날 참여한 레퍼런서 멤버들은 모두 깊이 감동 받았어요. 레퍼런서 남연님은 "그래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해 모두 감탄하기도 했고요. 아토피로 긴 시간 어려움을 겪었던 찬이님은 두란님의 지난 시간에 공감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어요.
레퍼런서 윤승님은 장문의 후기를 남겨주시기도 했는데요. "두란님 예전 일과 지금 일이 달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했다"며 "늘 나 외에 타인에게 머무른 시선이 두란님을 지금에 이르게 했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어요. 이어 "제 시선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며 도전받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강조했죠.
세 번째 레퍼런서 살롱 주인공은 '9번의 이직과 1번의 창업'을 경험한 레퍼런서 박지영님이에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모든 걸 경험해 본 지영님의 15년. 다양한 일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도하고 반성하고 개선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을 들려주신다고 하는데요. 창고살롱 멤버들만 참여 가능하니 지영님의 서사가 궁금한 분들은 후기를 기다려 주세요.
레퍼런서 두란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oorani
'고마워서그래' 인스타그램 http://instagram.com/thank.you_2020
정리∙편집 : 창고살롱지기 인성